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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K 특집

슬기로운 생각

It's okay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은
배우거나 더 배우거나
글 · 김호연
2022년 가장 사랑받은 소설 『불편한 편의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 그에게도 20년의 무명 시절이 있었다. 힘들었던 시기 그가 버틴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쓰겠다는 김호연 작가에게서 듣는 ‘괜찮아, 한 번 더!’의 이야기.

김호연 작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2013년 《망원동 브라더스》로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 《연적》, 《고스트라이터즈》, 《파우스터》, 《불편한 편의점 1》, 《불편한 편의점2》과 산문집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김호연의 작업실》을 펴냈고, 영화 <이중간첩>, <태양을 쏴라>의 시나리오와 <남한산성>의 기획에 참여했다. 작가의 대표작 《불편한 편의점》은 1·2권 통합 100만 부 판매를 기록한 밀리언셀러로 전국 35개 지역을 비롯해 국립중앙도서관, 알라딘, YES24, 밀리의 서재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미국, 일본, 대만, 폴란드 등 14개국에 판권이 수출/출간되었고 현재 연극과 드라마로 제작 중이다.


실패와 좌절이 작가로서 삶의 동력이자 일부가 되고

‘WIN OR LEARN’ 이 격언을 알게 된 건 몇 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격언을 듣는 순간 즉시 지난 20여 년의 작가 생활이 내 머릿속에서 하이라이트 필름처럼 상연되었다. ‘이기거나 배우거나’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이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은 배움일 뿐이지 실패나 좌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실패와 좌절이 작가로서 삶의 동력이자 일부가 되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된 글을 쓰게 되었으니까.

대학 졸업 후 처음 얻은 직장이 영화사 시나리오팀이었다. 한국 영화계가 호황인 시절이라 영화사에서 작가에게 월급을 주는 시절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시나리오 한 편을 썼는데, 곧바로 유명 배우가 캐스팅되어 제작이 결정되었다. 사실 이런 경우는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애송이 작가는 그걸로 만족할 수 없다며 어깨에 뽕만 잔뜩 채웠다.

자만한 나는 영화사를 나와 1년 동안 혼자 세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혼자 쓰면 혼자 모든 몫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고, 명성도 생길 거라 여겼다. 무엇보다 나만의 이야기를 간섭받지 않고 쓰고 싶었다. 그렇게 완성한 시나리오 세 편을 20여 군데 영화사에 보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아니, 거절 답변도 받지 못한 곳이 대다수였다. 영화사에서 답도 할 필요가 없는 습작 시나리오들. 그게 내 현재란 걸 깨닫고 좌절했다.

하지만 나는 시나리오 쓰는 걸 멈추지 않았다. 좌절하기엔 극장에서 내가 쓴 시나리오가 영화가 되어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나만의 이야기를 영화라는 예술로 구현하는 것이 일이자 삶이자 로망임을 깨달았다. 다만 당장 시나리오를 써서 먹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다른 일을 구해야 했다. 그나마 글쓰기와 가까운 일을 구하려고 애를 써, 다행히 한 출판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끈기와 독기가 실력과 재능인 영역도 있다.
글쓰기가 그러했다.
이제 필요한 건 시간뿐. 나는 오래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생의 끝까지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실패의 순간을 되새겨 방향을 전환한 것

출판사에서는 스토리 분야인 만화와 소설 편집을 하며 다양한 이야기 장르에 대해 배웠다. 퇴근 후 시나리오 쓰기에도 힘이 붙었다. 그렇게 4년의 직장생활을 보내고 다시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2007년 초, 퇴직 후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퇴직금으로 작업실을 구하고 매일 작업실에서 끙끙대며, 2년간 다시 시나리오 세 편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 역시 한 편도 팔리지 않았다. 영화계는 이미 불황이 찾아왔고, 그동안 실력이 늘었다고 여겼지만 시나리오가 영화로 제작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라는 것만 알게 되었다. 퇴직금은 바닥이 났고 생계 고민에 머리카락이 슝슝 빠졌다. 완전히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기분은 기분이고 할 일은 해야 했다. 포기하기에는 온 청춘을 바친 일이었기에, 아니 이제는 다른 일을 구하기도 늦은 나이이기에, 열심히 작가 일을 알아봐야만 했다. 그리고 운 좋게 한 유명 감독의 차기작 프로젝트 작가 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흥행 불패 감독의 팀에서 좋은 대접을 받으며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그간의 고생이 다 사라지고 대박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길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 작가 팀도 해체되었다. 2011년의 끝자락이었고 유독 추운 연말이었다. 이제 시나리오 작가를 때려치울 오만 가지 이유가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내 그간의 경력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시나리오 작가가 유일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시나리오를 쓰는 것밖에는 없었다. 나는 배수진을 치고 다시, 썼다. 시나리오를 써서 지원사업에 당선되거나 각색 일을 얻어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 쓰기는 이제 꿈보다는 생계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그때 내게 온 작은 깨달음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결국 내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기 위함인데, 시나리오를 써서 안된다면 다른 이야기 매체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쓰려던 시나리오 아이템 하나를 소설로 완성해 한 장편소설 공모전에 제출했다. 그리고 당선되어 소설가가 되었다.

2013년 여름,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잠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자리에도 오르며 화제가 되었다. 연말에는 영화 판권이 팔려 궁핍한 살림에 잠시 볕이 들었다. 그다음 해에는 연극으로 무대에서 재현되어 많은 관객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또 써도 안 되던 실패의 순간을 되새겨 소설을 쓰기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움이자 성취였다.


삶의 깃발과도 같은 글쓰기를 계속 펄럭이기로

그래서 소설만 쓰고 시나리오 쓰기는 접었냐고? 그럴 리가 없다. 소설가가 되고 데뷔작이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음에도, 소설만 써서 대한민국에서 먹고 살기란 말 그대로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나는 다시 시나리오를 써서 돈을 버는 한편, 남는 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썼다. 깔끔하게 한 가지 영역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시나리오를 쓰면 돈은 벌지만 좀처럼 영화로 완성되지는 않아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없었고, 소설을 쓰면 어쨌든 책이 출간되어 독자들을 만나게 됐지만,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책이 팔리진 않았다.

두 분야를 오가며 악착같이 썼다. 둘 중 한 분야에서라도 승리를 얻을 때까지 쓰기로 했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소설까지 2년에 한 번꼴로 출간을 했지만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얻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그 와중에 작업한 시나리오 하나가 영화로 완성되어 개봉했는데, 이 역시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니 사실 언제까지 쓰고 또 쓰고 배우며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지 두려웠다. 나이가 들수록 총명함과 집중력은 휘발되는 듯했고 필력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듯 자주 집필을 멈추게 되었다. 연이은 척추와 요추의 디스크 탈출은 글을 쓰는 물리적 행위조차 힘들게 했다.

영국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Every Teardrop Is A Waterfall’이란 곡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이 내게 심각한 상처를 준다 해도 나는 계속 깃발을 들고 서 있을 것이다’ 나라고 계속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 시나리오를 쓰는 공허함이 없었을까? 고생 끝에 완성한 소설이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 고역이지 않았을까? 쓰라리고 괴로웠다. 고독하고 막막했다. 좌절감에 치를 떨며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끝내지 않는 한 끝은 없다고 여겼다. 깃발을 계속 들고 서 있을 거라고 다짐했다. 실력과 재능이 부족하면 끈기와 독기는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다. 끈기와 독기가 실력과 재능인 영역도 있다. 글쓰기가 그러했다. 이제 필요한 건 시간뿐. 나는 오래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생의 끝까지 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콜드플레이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삶의 깃발과도 같은 글쓰기를 계속 펄럭이기로 했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은
배움일 뿐이지 실패나 좌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실패와 좌절이 작가로서
삶의 동력이자 일부가 되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된 글을 쓰게 되었으니까.



계속된 배움으로 스토리텔러의 삶을 지속

2019년, 나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로서의 내 정체성을 긍정하게 되었다. 스토리텔러. 우리말로는 이야기꾼. 이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채 소설과 시나리오 두 분야에서 유연하게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시나리오 작가로 살 때는 소설가는 꿈도 꾸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고 나서는 시나리오 작가는 때려치우고 소설가로 잘나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모두를 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작가였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가 잘 되면 하나를 그만둘 필요가 없이 양쪽 분야를 모두 쓸 수 있게 되었고, 두 배의 배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다시 시나리오를 쓰며 틈틈이 쓴 다섯 번째 소설이 2021년 봄에 출간되었다. 팬데믹의 봄에 조용히 등장한 그 소설은 해를 거듭하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이자 내 대표작이 되어주었다. <불편한 편의점>으로 받은 큰 사랑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잠시 넋이 나갔다. 이겼냐고? 소설이 잘 되어 시나리오는 이제 안 쓰냐고? 아니, 이 역시 배움이었다. 소설 쓰기가 생계의 주요 수단이 되었을 뿐이지, 시나리오 쓰기라는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결국 이기는 것도 배우는 것이다. 계속된 배움만이 스토리텔러의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준다. 배우거나 더 배우거나. 내게 시나리오 쓰기는 배우기였고, 소설 쓰기는 더 배우기였다.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배우고 더 배운다면 당신의 삶은 이미 승리 그 자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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