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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의 만남

앙리 마티스는 말했다.
“음악과 색깔은 공통점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 다 평행 경로를 따른다.
7개의 음표는 약간의 수정으로 어떤 작곡도 가능해진다.
시각 예술도 마찬가지 아닐까?”

writing. 박혜성 (화가, 작가)

마티스 <음악>, 1939년, 버팔로 AKG 아트 뮤지엄

MUSIC & ART

앞선 화가들의 음악 사용법

현대미술의 메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가면 내로라하는 작품들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또한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춤>도 놓쳐서는 안 되는 대표작이다. 최고의 현대미술관에서 우열을 다투는 피카소와 마티스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맞수이지만,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나누며 존경하는 사이였다.
1905~1906년 마티스가 야수주의 정석 <삶의 기쁨>을 발표했을 때, 피카소는 강한 질투심에 타올랐다. 경쟁의식을 느낀 피카소가 고심 끝에 발표한 그림은 바로 입체주의 첫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 마티스의 야수주의가 자연의 색을 거부하고 원색으로 그림을 이끌었다면 피카소는 전통적인 일시점(一視點)의 표현을 거부하고 다시점(多視點)으로 파괴와 분열의 미를 표현했다.
한편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1932~2006)은 1950년 도쿄대학에서 미학,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음악사와 작곡을 배웠다. 1956년 독일로 유학을 간 그는 전통적인 음악보다는 전위적인 실험 음악에 빠져들었다. 백남준은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를 만나면서 악보와악기에 대한 개념을 파괴했으며 결국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며 전위 예술가로 자리 잡는다.
앞선 화가들에게 전통이란 파괴의 대상이며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이번 호에서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한 피카소와 마티스 그리고 백남준이 만난 음악에 대해 살펴보자.

Henri
Matisse

마티스 <음악 수업>, 1917년, 반스 파운데이션 미술관

음악이 흐르는 마티스의 그림

피카소보다 12살 연상인 마티스는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순탄한 삶을 살았다. 프랑스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마티스는 파리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고향으로 돌아와 법률사무소에 근무했는데 맹장염에 걸리고 잠시 휴식기를 가진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버렸다. 21세에 취미로 시작한 그림은 에콜 데 보자르 입학으로 이어졌고 착실하게 미술사의 족적을 남긴 화가들을 탐색하며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아갔다.
마티스는 화가로서뿐 아니라 음악광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그림에는 바이올린, 피아노, 만돌린 등 악기가 종종 보인다. 1918년 49세의 마티스는 바이올린을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력을 잃어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틈틈이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1917년 프랑스 니스의 보 리바쥬 호텔에서 몇 개월을 보낸 마티스는 악기가 나오는 그림을 여러 점 남겼다. 마티스 가족이 모델로 등장하는 <음악 수업>을 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 중 하나인 필라델피아 반스 파운데이션 소장품인 이 작품은 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필자는 이 작품을 직접 보았는데, 반스의 독특한 전시 방식에 감탄하며 마티스의 작품에 푹 빠졌던 기억이있다. 큰아들 장은 담배를 피우면서 책을 보고 있으며 검은 목 밴드를 한 큰딸 마그리트는 동생 피에로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마티스의 바이올린과 케이스, 하이든의악보가 보인다. 부인은 정원에서 뜨개질 중인데 행복한 가정의 아름다운 일상이다.

마티스 <왕의 눈물>, 1952년, 퐁피두 센터

마티스의 도전 정신과 음악

마티스는 1941년 장암 수술과 관절염 악화로 휠체어 생활을 하며 색종이 컷아웃 콜라주로 작품을 이어갔다. 관절염으로 붓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마티스는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덕분에 마티스는 종이 콜라주로 대작을 완성하며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한편 미국의 재즈 연주자들은 1, 2차 세계 대전을 피해 파리로 이주하여 활동했는데, 음악을 워낙 좋아한 마티스는 라디오와 축음기를 통해 재즈 음악을 들으며 재즈광이 되었다. 1947년 재즈 음악을 주제로 한 컷아웃 콜라주 아트북을 출간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색종이 컷아웃으로 완성된 <왕의 슬픔>은 마티스의 마지막 자화상이다. 렘브란트의 <사울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왕, 1655>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에서 검은 의자 위두 손과 바이올린은 마티스 자신이다. 마티스는 렘브란트에 대한 오마주로 이 그림을 구상했으며 하프 연주 솜씨가 뛰어났던 다윗왕을 자신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마티스의 도전 정신은 실로 존경스럽다. 미래가 보장되는 변호사에서 화가로 변신했으며전통 회화에 반기를 들고 야수주의라는 새로운 양식을 찾았다. 몸이 쇠약해진 노년에는 물감 대신 종이 콜라주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업적은 미술사를 새롭게 썼는데, 그의 음악 사랑은 작품과 인생을 더 풍요롭고낭만적으로 만들었다.

Pablo
Picasso
피카소 <늙은 기타리스트>, 1903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피카소의 청색 시대

스페인 말라가 출신의 피카소는 미술 교사인 아버지의 지도하에 그림을 시작했으며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미술학교를 거쳐 19세에 파리로 건너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 20세기 최고의 화가이다. 10대에 고전을 익힌 후 20대에 전통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조를 찾았으며 평생 쉼 없이 왕성히 활동했다. 하지만 피카소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 바로 고국을 떠나 파리에 처음 정착한 시기였다. 파리 화단에서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피카소는 외롭고 궁핍했는데 공교롭게 고향에서 함께 온 친구 카사헤마스가 여자 문제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까지 겹치면서 피카소는 큰 상실감에 빠졌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주목하며 그림을 남겼는데 이때의 작품을 청색 시대(1901~1904)라고 부른다.
그의 <늙은 기타리스트>을 보자. 시각 장애인으로 보이는 가련한 노인이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앙상하게 드러난 체구와 구멍 난 윗옷으로 노인의 가난이 짐작된다. 피카소는 노인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여 자화상 같은 초상화를 그렸다. 살기 위해 기타를 연주하는 노인과 예술가의 처지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피카소는 음악이 삶의수단이 되지 못할 때의 좌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일부 미술사학자는 노인이 생존을위해 기타를 연주하는 것은 예술가들의 고독한 삶과 비슷하다고 설명한다. 피카소의이 그림은 1886년에 그려진 조지 프레드릿왓츠의 <희망>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피카소와 마티스의 특별한 인연

피카소의 암울했던 청색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몽마르트르에서 첫 연인 올리비에를 만나며 핑크빛 시대(1905~1907)가 탄생했으며 이어 흑색 시대(1906~1907)를 거쳐 입체주의를 찾게 된다.
그의 입체주의 작품 <세 명의 음악가>를 보자. 이 작품은 두 개의 버전으로 그려진 대형작품으로 한 점은 뉴욕현대미술관, 한 점은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뉴욕현대미술관 <세 명의 음악가>의 크기는 200.7 ×222.9cm이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발표하며 입체주의에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이탈리아 고전 희극에서 영감을 받아 가면을 쓴 세 명의 음악가를 그렸는데 좌측은 클라리넷 부는 피에로, 중앙은 기타 치는 아를르캥, 우측은 악보를 쥔 카푸친으로 보인다. 혹자는 아를르캥은 피카소이며 두 명은 친구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보로 해석하기도 한다. 피카소는 음악과 이탈리아 희극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아를르캥을 여러 번 그렸다. 이 외에도 광대, 서커스 단원, 음악가와 악기 등도 수차례 그렸다.
앞서 언급한 마티스는 화려한 원색으로 음악을 표현했고, 피카소는 형태를 파괴하며 음악을 표현했다. 1908년 마티스가 피카소 화실에서 브라크의 입체주의 그림을 보며 ‘작은 입방체’라고 설명한 것에서 입체주의 명칭이 지어졌는데, 늘 그렇듯 가볍게 지어진 이름이 더 와닿는다.

피카소 <세 명의 음악가>, 1921년, 뉴욕현대미술관
Nam
June
Paik
백남준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 1959년, 백남준아트센터
비디오아트의 아버지, 백남준

백남준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피아노 등 음악을 공부했다. 한국전쟁 발발로 일본으로 건너간 백남준은 도쿄대학교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으며 음악사와 작곡을 부전공하였다. 이후 독일에서 실험 음악에 심취하여 전위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미디어 아티스트’로의 길을 시작하게 된다.
백남준은 독일 유학 시 만난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로 인해 작품세계에 전환점을 맞이한다. 존 케이지가 보여 준 실험 음악은 전통적인 악보와 악기의 개념을 벗어난 것이었다. 악보에 문자, 그래프, 숫자, 기호를 써넣으며 연주자가 때와 장소에 따라 변주하고 소음도 음악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물체는 악기가 될 수 있는데 무대 위의 연주는 연극에 가까웠으며 이를 행위 음악이라고 한다. 존 케이지를 미술의 고정 관념을 깬 마르셀 뒤샹과 비교하기도 한다.
1958년 케이지의 공연을 본 백남준은 음악의 개념을 완전히 깬다. 백남준의 첫 퍼포먼스는 제목도 <존 케이지에게 바치는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다. 백남준은 릴 테이프에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등의 고전 음악과 잡음을 녹음하여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서 테이프를 재생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1960년에는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으로 연주 중 피아노를 부수고 케이지의 넥타이와 셔츠를 자르고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이 연주는 너무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는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 혹은 파괴 예술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행위 음악은 비디오아트로 이어지고

백남준은 듣는 음악보다 보는 음악에 더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행위 음악을 하게 되었고 비디오아트를 혼합한 작품세계를 보여 주며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60년대 그의 전시에는 이미 TV가 등장하였고, 70년대에는 비디오로 피아노를 치면 어떤 화면이 나오는지 실험하였다.
그의 첫 번째 비디오아트 작품 <음악 박람회: 전자 텔레비전, 1963>을 보면, 13대의 텔레비전을 연결한 뒤 자석을 이용해 화면을 찌그러트렸는데 이는 음악과 미술을 융합하하는 동시에 미디어의 의미를 크게 확장한 전시였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한 백남준은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티스트로 명성을 쌓아간다. 1984년 백남준은 마침내 세계적인 아티스트 반열에 오르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다. 파리와 뉴욕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퍼포먼스와 음악을 연주했고, 이 장면은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국경을 뛰어넘는 글로벌 아티스트로서 백남준이 펼쳐 왔던 작품세계는 음악, 미술, 비디오 그리고 퍼포먼스를 모두 아울렀다.
마침 올해는 백남준 작가 탄생 90주년이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2023년 2월 26일(상영시간: 목~일, 14~16시)까지 그의 <다다익선>이 3년간 보존 및 복원을 끝내고 재가동되고 있다. 가을이 가기 전 그의 숨결을 직접 느껴 보는 것은 어떨까?

백남준 <다다익선>,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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