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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화가

앙리루소와 루이 비뱅

writing. 박혜성 (화가, 작가)

루이 비뱅 <리알토 다리>

소박파 화가 앙리 루소와 루이 비뱅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늦은 나이에 독학으로 미술계에 입문했으며, 자신의 새로운 캐릭터라 일컫는 ‘부캐’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해 꿈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굴곡 사이사이에는 그림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꿈을 간직한 이들의 모습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어 보는 것은 어떨까.

루이 비뱅 <피렌체> 앙리 루소 <이국적인 풍경>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와 루이 비뱅(Louis Vivin, 1861~1936)의 생업은 세관원과 우체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소박파’(Naive Art)라는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소박파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늦은 나이에 독학한 화가들이 사실적인 구상을 그리는 양식을 말한다. 미술사의 주류 유파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정겨운 그림으로 지금까지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두 사람이 자신의 직업, 나이, 환경에 연연했다면 이들의 사랑스러운 그림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루소와 비뱅의 그림을 보며 자신의 꿈을 찾아 끝까지 고군분투한 이들이야말로 위대한화가라는 생각을 한다.
소박파의 선구자인 앙리 루소는 열대 지방풍경화로 유명하다. 루소는 이국적 풍경화의영감을 자신의 멕시코 군 복무에서 받았다고 하였지만, 사실 그는 프랑스를 벗어나 해외로 나간 적이 없다. 루소의 그림 속 이국적인 동식물들은 파리 동물원, 식물원, 동화책,엽서, 잡지에서 소재를 찾은 것이다. 루소의 자유로운 발상과 소재 조합은 이후에 나타난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소재와 원근법을 무시하는 구성은 앙리 루소를 포함한 소박파 화가들의 특징이다.
파리의 우체부였던 루이 비뱅의 풍경화에는꽃의 도시 피렌체가 피어나고 물의 도시 베네치아가 찰랑거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루이 비뱅 역시 이탈리아 여행을 한 번도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비뱅은 42년을 파리의 우체부로 지내며 61세 정년 퇴임 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버릴 쓰레기가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고 하니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우체부라는 직업덕분에 누구보다 엽서를 많이 접했고 자연스럽게 엽서에서 영감을 얻었다. 비뱅은 그림을 재구성하고 예술적 상상력을 더해 자신만의 색감을 입혔다. 앙리 루소와 루이 비뱅은 가정 형편상 많은 것을 몸소 체험할 수없었지만, 캔버스라는 공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루이 비뱅 <몽마르트르 전경>

지식보다 중요한 상상력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라고 했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루이 비뱅은 가본 적 없던 이탈리아를 엽서만 보고도 환상적으로 그렸으며 파리의 풍경들도 재밌게 해석해 내었으니 그는 정말 상상력 부자이다.
이름이 생소한, 아니 어쩌면 처음 들어본 듯한 루이 비뱅은 어떤 화가일까? 1861년 파리 근교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비뱅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와 재정적인 이유로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우체부의 길을 갔다. 19세에 파리의 우체부가 된 루이 비뱅은 42년간 우체부로 근무하며 가장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퇴직 후 오랜 꿈이었던 캔버스 앞에 앉았다. 누군가는 뭔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라고 했지만 ‘즐길 수 있다면 그때가 가장 좋은 때다’라는 생각으로 그림에 몰입했다. 비뱅의 캔버스에는 센강이 흐르고 파리의 골목길과 복작복작한 이야기가 피어났다. 비뱅은 파리 시내를 누구보다 많이 다니며 파리의 풍경들을 눈에 담고, 흘러가는 일상의 순간들을 포착했다. 비뱅은 전체적인 구성과 균형미를 추구했으며 회색 톤을 즐겨 그린 특징이 있다. 그러나 원근법과 명암, 시점 등이 전문 화가가 그렸다기보다는 십화가 혹은 아마추어 화가가 그린 듯한 느낌이 있다.

루이 비뱅 <몽마르트르, 눈 내린 테르트르 광장>

몽마르트르 거리에서 운명적인 만남

예술가의 성지 몽마르트르에 오래 살았던 루이 비뱅은 몽마르트르 거리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내다 팔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미술사학자이자 화상인 빌헬름 우데(Wilhelm Uhde, 1874~1947)의 눈에 띄게 되었다. 비뱅의 그림은 전통적인 주류 그림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순수하고 사람들의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우데는 최초로 피카소의 입체주의 작품을 알아본 눈 밝은 전문가였다. 또한, 우데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늦은 나이에 독학한 화가들을 주목하고 이들을 ‘소박파’ 화가라 명명하며 최초의 ‘소박파전’을 개최했다. 소박파전에 참가한 화가는 앙리 루소, 루이 비뱅, 세라핀 루이, 앙드레 보샹, 카미유 봉부아였다.소박파 화가들의 그림은 ‘당신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림에 담긴 독학 화가들의 열정과 아이 같은 천진함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었다. 특히 비뱅이 그린 소소한 풍경들은 바쁘게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늦깎이 독학 화가들의 그림은 파리 시민은 물론요즘 세대에게까지도 감동을 준다.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여인>

일요화가에서 모마에 작품을 건 앙리 루소

소박파의 대표 화가 앙리 루소는 49세까지 말단 세관 공무원이었다. 루소는 세관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일요일마다 그림을 그리는 일요화가였다. 일요화가는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말한다. 루소는 40세에 루브르 미술관에서 모사증을 받아 미술관 구석에서 명화를 익히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급기야 전업 화가가 되기 위해 22년간 다녔던 세관원을 조기 은퇴하였다.
내가 루소의 그림을 직접 본 것은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에서였다.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마티스 <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등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나의 발걸음을 딱 멈추게 한 작품이 있었다. 바로 루소의 <잠자는 집시 여인>이었다. 여행의 고단함에 지칠 무렵 <잠자는집시 여인>을 보는 순간, 마음의 평화와 안식이 찾아왔다. 마치 ‘지금까지 충분히 수고했어, 이제 편히 쉬렴’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달빛 아래 곤히 잠든 집시 여인 곁의사자는 그녀의 수호천사가 아닐까?
판타지 동화 같은 <잠자는 집시 여인>은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다.그림을 유심히 보면 사자와 항아리는 옆에서 본 시점이고 여인과 만돌린은 위에서 본시점이다. 즉 두 개의 시점으로 그린 것이다.이는 입체주의의 다시점(多視點)과 같은 것이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첫 그림 <아비뇽의처녀들>은 1907년에 등장했는데 <잠자는집시 여인>은 이보다 10년이나 앞선 1897년에 그려진 것이다.

앙리 루소 <꿈>

피카소도 감동한 루소의 그림

루소는 미술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은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렸다.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잡지, 사진, 엽서를 참고했으며 1889년 만국 박람회에서 본 박제된 야생 동물과 아프리카나 타히티의 이국적인 전시품 그리고 파리 식물원에서 영감을 받았다. 루소의 자유로운 발상은 전위 미술가들의 눈에 띄었다. 1906년부터 루소 주변에는 시인 알프레드, 아폴리네르, 화가 마리 로랑생, 피카비아, 위틀리로, 브랑쿠시, 레제, 미술 평론가 빌헬름 우데 등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피카소와 브라크도 있었다. 루소의 진가를 알아본 피카소는 1908년 한 고물상에서 구석에 놓인 루소의 <여인의 초상>을 발견하고 헐값에 구매한 후 기뻐서 루소를 자신의 화실에 초대하여 파티를 열어 주기도 했다. 루소의 신선한 시각은 피카소와 동료 화가들에게 중대한 방향을 제시했다.
루소가 사망하기 직전에 그린 대형화 <꿈>을 보면 빅토리아풍 소파가 정글에 놓여 있고 원시 소녀 야드비가(Yadwigha)가 누워 있다. 수풀 사이에 사자와 코끼리가 보이고 줄무늬 옷을 입은 검은 피부의 사람은 악기를 불고 있다. 소녀의 이름을 넣어 <야드비가의 꿈>이라고도 부르는 이 작품은 소녀의 환상이 밀림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루소가 직접 설명했다.

루이 비뱅 <웨딩>

부캐로 인생의 전환점을 찾은 행복한 화가

루이 비뱅과 앙리 루소의 생업은 각각 우체부와 세관 공무원이었지만, ‘본캐’보다는 ‘부캐’인 화가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었다. 루이 비뱅은 퇴직 후 62세부터 붓을 들어 10 년 남짓 작품에 매진했다. 73세에 뇌졸중으로 한쪽 팔이 마비가 올 때까지 그림을 그렸으며 비교적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6년 75세로 비뱅이 사망한 후 1938년부터 1976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모마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비뱅과 같이 전시한 화가는 피카소, 마티스, 호안 미로 등이며 소박파 화가 루소와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도 함께 전시하였다. 모마는 비뱅의 작품 <웨딩>과 <팡테옹> 두 점을 구매하였다. 이로써 비뱅의 작품은 세계적인 미술관에 소장되었고, 소박파 화가로 기록되었다.
앙리 루소는 안타깝게도 이름을 떨칠 즈음 66세에 파리 자선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루소의 진정한 평가는 사후에 이루어졌다. 비현실적이고 생소한 루소의 그림은 초기에는 비웃음을 샀지만, 현재는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나는 비뱅과 루소의 그림을 보며 그들의 ‘부캐’에 대한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의 삶과 생업은 불가분의 관계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부캐’로 삼는 일은 그 자체가 행복이 아닐까? 두 사람은 모마에 작품을 건 성공한 화가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꿈을 실현한 스토리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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