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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빛낸 6명의 화가 the Salon #3

조선의 3원 3재를
아시나요?

writing. 이소영(소통하는 그림연구소 대표)




3원 3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6대 화가를 의미하는 말이다. 언제부터 생긴 단어인지 정확히 유래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을 3원(三園)이라 하고,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겸재(謙齋) 정선(鄭敾)을 3재(三齋)라고 한다. 조선시대는 한국 역사상 회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도화서의 화원들을 비롯해 사대부들은 송, 원, 명나라의 회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자신만의 화풍으로 재해석했다. 그중 3원 3재 화가들을 빼놓을 수 없다. 유홍준은 <화인열전2>에서 조선시대 화가들 중 3원 3재를 지칭하는 단어에 대해 이런 식으로 단어를 만들어 한 시대의 예술을 저울질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사실상 이들이 영조와 정조 시대라는 그림의 전성기와 왕조의 마지막 미술을 장식하고 있기에 세간의 평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며 3원 3재의 의미의 역사성을 이야기했다. 오늘은 3원 3재였던 조선을 빛낸 화가 6명의 다양한 그림을 소개한다.

<버드나무 타고 낚시하다>

단원김홍도

檀園 金弘道

김홍도, 버드나무 타고 낚시하다, 18세기, 23.4×27.8cm

是非不到釣魚處
시비는 고기 낚는 곳에
닿지 않고

榮辱常隨騎馬人
영욕은 항상 벼슬아치들을
따르네

그림에서 여유를 찾다

김홍도하면 떠오르는 그림은 아마도 대부분 <서당>, <씨름> 등일 것이다. 맞다. 그는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가다. 하지만 나는 김홍도가 청년을 그린 그림들을 유독 좋아한다. 한 청년이 버드나무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당연히 강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새롭게 보면 하늘 위에 떠있는 것 같기도 하다. 조선 후기 회화에서는 봄을 나타내는 식물로 매화나, 버드나무를 곧잘 활용했다. 버드나무는 다른 그 어떤 나무보다 키가 크고 가지가 풍성해 잎의 변화가 눈에 띄는 나무다. 그래서일까? 김홍도의 그림 속 청년은 되레 풍만한 버드나무를 소파같이 생각하고 편하게 앉아 있는 느낌이다. 물고기가 잡히거나 말거나 여유 있어 보이는 청년의 표정을 보면, 하루의 모든 시간을 체크하고 쫓기며 일하는 현대인들의 노고를 그림 속 청년 곁에 살며시 얹어 놓고 싶다.
김홍도의 그림에서 여유를 찾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문구가 바로 화면 상단에 적힌 시조로, 왼쪽과 같다.
조선왕조의 문화 부흥기라고 불렸던 정조 시대에 육십의 나이까지 어진부터 서민들의 풍속이 담긴 풍속화, 규장각도와 신선도까지 그려낸 김홍도 역시 그림 속 청년처럼 그저 물이 흐르는 방향을 바라보며 쉬고 싶지 않았을까?

<월야밀회>

혜원 신윤복

蕙園 申潤福

신윤복, 월야밀회, 18세기 후반,
28.2×35.6cm

東家食西家宿,
떠돌면서 살았으며

似彷佛方外人,
마치 이방인 같았고

交結閭巷人
항간의 사람들과
가까웠다

남녀의 애정사를 거침없이 묘사하다

나는 화가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인데, 대부분 서양의 화가들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 조선의 화가 이야기는 많지 않다. 하지만 신윤복만큼은 다르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2008년 <바람의 화원>이라는 제목으로 신윤복이 여자라는 설정으로 방영되었고, 같은 해 <미인도>라는 영화 역시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했다. 신윤복은 한국 회화를 통틀어 남자와 여자의 로맨스를 가장 활발하게 그린 화가다. 달밤에 남녀가 몰래 만난다든가, 지나가던 여인에게 마음을 뺏겨 사랑에 빠진 남자라든가… 신윤복의 그림 속 이야기는 상당히 내밀하고 흥미진진하다. 10대 후반에 도화서에 들어가서 영조와 정조의 어진을 그렸던 김홍도의 삶과는 다르게 신윤복은 여러 곳을 떠돌며 살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손자 이구환이 엮은 <청구화사(靑丘畵史)>에서 신윤복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보면 왼쪽과 같다.
신윤복의 호 혜원 역시 ‘혜초정원(蕙草庭園)’을 줄인 말로 혜초는 콩과 식물로, 여름에 작은 꽃이 피는 평범한 풀이기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신윤복의 삶과 어울린다. 어두운 밤 두 남녀가 사랑에 빠져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것은 담장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한 여인이다. 원래 남의 연애 스토리가 제일 재미있는 법 아니겠는가? 이처럼 신윤복은 그 누구도 그리지 않았던 금기시되었던 남과 여의 애정사를 거침없이 묘사했던 화가다. 나 또한 가끔 20대의 열정적이던 연애시절이 그리울 때면 신윤복의 그림이 떠오른다.

<호취도>

오원 장승업

吾園 張承業

장승업, 호취도, 19세기 후반, 135.5×55cm
그림 속 구도가 보여 주는 긴장감

장승업은 어린 시절 부모가 돌아가셔서 고아로 성장한 화가다. 그림 역시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 독학으로 익혔다. 술과 여자를 상당히 좋아했으나 평생 독신으로 지냈기에 ‘고독한 야수’같은 존재다. 하지만 그림을 너무 잘 그려 민영환이 고종에게 추천해 궁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궁이라는 곳의 속박된 삶이 싫어 결국 궁을 나와 버렸다. 장승업의 그림 중 <호취도>는 그의 천재성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그림 속에는 두 마리의 매가 있다. 우측 상단의 매는 지금 막 나무에 앉은 듯 보이고, 우측 하단의 매는 이미 먼저 와 앉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매 사이의 거리감과 맹렬한 눈빛이 만들어 내는 구도가 보는 이들에게 긴장감을 준다.

<자화상>

공재 윤두서

恭齋 尹斗緖

윤두서, 자화상, 18세기 초반, 38.5×20.5cm
전신사조를 구현하다

한 남자의 얼굴이 허공에 떠 있다. 눈매는 고양이처럼 매섭고, 수염은 한 올 한 올 가늘고 정확하게 뻗어 있다. 사실 귀도 없고 목도 없어서 무섭기까지 하다. 극도로 사실감 있게 그려진 그림 속 남자. 그는 누구일까? 바로 윤두서 자신이다. 이 그림은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초상화 중 어떤 작품이 가장 강인한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바로 윤두서의 자화상을 말한다. 크기는 작지만 작품 안에서 뿜어내는 기운만큼은 그 어떤 그림보다 대담하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화가였던 그는 본인의 자화상 속에 자신이 지닌 특징적인 분위기를 탁월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잘 구현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인물을 그릴 때 인물의 외형뿐 아니라 정신세계를 올곧이 표현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이를 전신사조라 한다. 여러 연구에서 윤두서의 성격에 대해 추측하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사실이라 보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무인처럼 생겼다고 전해지는데 조금도 비스듬하지 않게 오로지 정면을 바라보는 윤두서의 자화상은 그가 어떤 성품이었을지 짐작게 한다. 지금 우리는 그를 만나 볼 수 없지만, 그 어떤 시련이 와도 반드시 이겨냈을 것 같은 성품이었을 듯하다.

<하마선인도>

현재 심사정

玄齋 沈師正

심사정, 하마선인도, 18세기, 22.9×15.7cm
작품에 투영한 자신의 바람

심사정은 화훼(花卉)·초충(草蟲)을 비롯, 영모(翎毛)와 산수(山水)에도 뛰어났지만 그의 내면이 가장 깊이 담긴 작품으로는 <하마선인도(蝦蟆仙人圖)>를 꼽을 수 있다.
화면 가득 크게 자리를 차지한 한 남자, 그리고 좌측 하단에 그 남자를 마주하는 두꺼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꺼비의 다리가 3개인 것도 눈치챘으리라. 그림 속 남자는 ‘유해(劉海)’라는 선인(仙人)이다. 유해는 10세기경 중국에 살았던 신선으로 이 두꺼비 덕분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두꺼비는 유해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데려다주는 신묘한 동물이었다. 그런데 유해도 두꺼비를 난감해 할 때가 있었는데 이 두꺼비가 자꾸 자신이 옛날에 살던 우물가로 도망쳐 버린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유해는 다섯 개의 갈고리(또는 엽전)가 달린 끈으로 두꺼비를 우물에서 건져 올리곤 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유해가 들고 있는 것이 바로 두꺼비를 잡아 올리는 끈이다. 사실 심사정은 꽤 훌륭한 집안의 자손이었다. 증조할아버지가 영의정이었고, 친척 중에 임금의 사위도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심익창이 과거 시험을 감독할 때 답안지에 이름을 바꿔치기하다 들통나게 되어 그는 관직을 빼앗기고 10년이나 귀양을 살았다. 이런 이유로 손자인 심사정은 조정에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펼치고자 하는 포부를 그림에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어떤 직책이나 소속감 없이, 선인 치고는 행색이 비교적 남루하지만 맨발로 서서 두꺼비와 대화하고 있는 그림 속 유해의 모습은 참 자유로워 보인다.
그림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바람을 투영하는 법이다. 이 그림을 볼 때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유해의 자유로운 모습에 심사정의 펼치지 못한 꿈이 담겨 있는 듯하다.

<박연폭포>

겸재 정선

謙齋 鄭敾

정선, 박연폭포, 18세기 중반, 119.5×52.2 cm
실경에 감정을 이입하여 표현하다

겸재 정선은 3원 3재 중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에 도화서의 화원이 된 그는 30세쯤에는 중국의 남화가 아닌 한국의 실제 풍경을 그리는 진경산수화를 창조해 냈다. 당시 화가들은 중국의 화첩을 교본 삼아 관념적인 산수를 그렸는데, 정선은 달랐다. 실제 우리나라의 풍경을 눈으로 보고 그 감흥을 작품에 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실제 풍경을 아주 사실적으로 스케치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선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회화적으로 재해석하되 작품 안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를 이형사신(以形寫神)이라 한다.
정선이 남긴 작품으로는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금강전도> 등 훌륭한 작품들이 많지만,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하고자 하는 작품은 <박연폭포>다. 보기만 해도 폭포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하다.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아래로 폭포는 한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낸다. 자연이 주는절경만큼 값진 것이 또 있을까? 정선은 폭포가 우리에게 주는 위엄과 신비를 이 작품에 두루 담아냈다. 우선 그림의 형태가 좁고 길어 극적이다. 개성시 천마산 기슭에 있는 박연폭포는 높이가 37m나 되는 놀라운 폭포다. 우측 하단에 작은 누각에서 사람들이 폭포를 즐기고 있다. 정선은 실제 박연폭포를 보고 받은 감흥을 바탕으로 폭포는 좀 더 크게, 누각과 사람들은 다소 작게 연출했다. 정선이 작품 안에 실경 산수를 보고 받은 진실된 감정을 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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