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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해

한 해가 가기 전,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해 보세요.
직접적인 표현이 어렵다면 사랑이 담긴 명화 한 점 어떨까요?

writing. 박혜성 (화가, 작가)

클림트 <키스>, 1907~1908,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갤러리
잊지 못할 순간을 담은 명화

2010년 명화 복제품을 판매하는 모 업체가 재미있는 순위를 발표했다. 자신의 업체를 포함해 메이저급 온·오프라인,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에서 판매된 명화들을 총망라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구매한 명화의 줄 세우기를 했는데, 이 순위는 우리가 좋아하는 명화를 실제 구매한 결과이기에 구체적이고 진정성이 있다.
그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화는 무엇일까? 판매 그림 중 17%를 차지하며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그림은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키스>이다. 또한 <키스>는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명화이기도 하다.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 주제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달콤한 것이 있을까? 연인과의 키스보다 더 황홀한 것이 있을까? 키스하는 그 순간은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무아지경에 빠진다.
한편 연인과의 사랑 못지않게 우리를 무장 해제시키는 것은 자식 사랑이 아닐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모델 카미유와 동거를 시작했던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는 첫아이를 얻은 후 그 기쁨을 그림으로 남겼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동에 결혼 초기 모네는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의 모습을 캔버스에 자주 담았다. 더불어 박수근(1914~1965)이 생의 마지막에 그린 <할아버지와 손주>를 보면조부모의 손주 사랑도 각별해 보인다. 잊지 못할 순간을 담은 명화를통해 우리들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려 보자.

황홀경에 빠진 연인,
그 순간을 담다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클림트 <아테제의 리츠베르크>, 1910~1912, 소장처 미공개

<키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두 눈을 꼭 감고 황홀경에 빠진 <키스>의 연인을 보노라면 셰익스피어의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라는 명언이 떠오른다. 황금빛 속의 연인들은 어떤 순간보다 행복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림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키스>를 그린 클림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장식성이 뛰어나고 에로틱한 작품으로 당대 최고의 평가를 받은 화가였는데, 빈의 카사노바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성적으로 자유분방했다. 심지어 그는 작품 속 모델과 모두 동침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럼 <키스>의 모델은 수많은 모델 중 한 명일까? 아니면 진정으로 사랑한 연인일까? 함께 추리해 보자.
클림트 인생에는 아주 중요한 두 여인이 있었다. 한 명은 그의 평생 동반자 에밀리 플뢰게이며, 또 다른 한 명은 작품 의뢰인의 아내였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이다. 먼저 첫 번째 여인 에밀리 플뢰게는 클림트 남동생 에른스트의 처제였다. 즉, 그녀는 클림트의 사돈처녀이다. 참고로 클림트의 남동생은 결혼 초에 일찍 사망하였다. 에밀리는 유명한 디자이너로 사업을 크게 하며 시대를 앞서간 전문직 여성이었다. 그녀 역시 평생 독신이었으며 클림트의 소울메이트였다. 매년 클림트와 오스트리아 아테제에서 여름휴가를 보냈고, 클림트는 그곳을 화폭에 담았다. 클림트의 <아테제의 리츠베르크>를 보자. 정사각형의 캔버스에 여백 없이 호수 풍경이 그려져 있다. 원근법 없는 평면적인 그림, 가로세로 비율 1:1, 1:2가 클림트 풍경화의 특징이다.

클림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903~1907, 뉴욕 노이에 갤러리

클림트 황금 시기 대표작 <키스>

또 한 명의 여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2015년에 상영된 영화 ‘우먼 인 골드’의 핵심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의 모델이다. 아델레는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유대인으로 매우 지적인 여인이었는데 남편 페르디난트와 결혼한 후 남편이 클림트에게 아델레의 초상화를 부탁하며 클림트와 인연을 맺었다. 그녀는 12년간 클림트의 연인이었다고 한다. 1907년 <키스>를 그릴 당시 클림트 나이는 45세로 이때는 아델레와 가까이 지낸 시기인 동시에 완숙기인 황금 시기였다. 시기적으로 키스의 모델이 아델레라면 황홀한 키스를 나누는 두 연인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더 뜨겁게 포옹한 것 같다. 하지만 클림트의 증언이나 기록이 없기에 모두 추측일 뿐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클림트의 두 여인 모두 키스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키스>에는 성적 은유들이 감추어져 있다. 남자 옷은 사각형의 흑백 문양으로 남성성과 성을 암시하고 여자 옷의 문양도 성적 표현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테두리는 남성 성기로 해석한다. 배경은 실제 금을 펴 바른 황금 비가 내리고 벼랑은 두 사람의 관계가 위태함을 암시한다. 아델레를 그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를 보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 작품은 사실주의적 표현과 추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집트 양식의 눈과 장식은 이국적이다. 클림트의 대표작이며 <키스>와 함께 황금 시기에 정점을 찍은 작품이다.

아름다운 시절을
섬세하게 그리다

오스카 클로드 모네
Oscar-Claude
Monet
모네 <까치>, 1868~1869, 오르세 미술관
아들 탄생의 기쁨을 그린 <까치>

25세의 모네는 18세의 카미유를 모델로 처음 만나 곧바로 연인이 되었다. 모네 가족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했지만 카미유는 모네의 뮤즈였으며 모네 작품의 여인은 모두 카미유일 정도로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했다. 1867년 아들 장을 얻은 모네는 “통통하고 예쁜 사내 녀석이 귀여워 죽겠어. 하지만 먹을 것 없는 애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터진다네.”라며 아이의 대부인 화가 바지유에게 편지를 적었다. 당시 모네는 화가로서 발돋움을 하던 터라 몹시 빈곤했다. 모네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노르망디 에트르타에서 살았는데, 막 태어난 아들을 설원 위 까치에 비유하며 아들 탄생을 주변에 알렸다. 까치는 동서양 구별 없이 기쁜 소식을 은유한다.
모네의 <까치>를 살펴보자. 순백의 마을에 비친 겨울 햇살은 푸른 그림자를 만들고, 울타리 대문 위에는 까치가 앙증맞게 앉아 있다. 이 그림은 모네가 유색의 그림자를 사용한 첫 그림 중 하나이며, 후에 인상주의 그림과도 연관된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빛과 그림자의 실제, 변화된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색 그림자를 사용했고, 그림자를 검은색으로 그리는 관습에 도전했다. <까치>는 모네의 140개 설경 그림 중 하나인데 그중 가장 큰 그림이면서 첫아들 탄생 기념화이다. 이 작품은 1869년 파리 살롱전에서 거절당하는 수모를 겼었지만,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은 모네가 그린 최고 설경 중 하나로 손꼽는다.

모네 <오찬>, 1873, 오르세 미술관
모네의 화양연화, 아르장퇴유 시절

1870년, 모네는 아들이 태어나고 3년 후 카미유와 결혼식을 올렸다. 모네 세 식구는 1872년 파리 교외에 있는 아르장퇴유로 이사했다. 모네는 이곳에서 5년간 거주하며 아내과 아들을 모델로 그림 연구에 몰두했다. 1872년 인상주의를 알린 <인상, 해돋이>도 이 무렵에 그려졌으며 2년 후 1874년에는 인상주의 그룹의 첫 전시가 개최된다.
모네는 아르장퇴유에서 자신의 집 정원과근처 시골 풍경, 센 강변을 인상주의 화풍으로 그렸다. 이때부터 작품 판매가 결실을 거두며 경제적 고통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모네의 작품 판매는 인상주의를 후원한 화상 뒤랑 뤼엘의 역할이 컸다.
아르장퇴유에서 그린 1873년 작 <오찬>을보자. 이곳은 모네가 처음으로 장만한 집의 정원이다. 아들 장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있고, 뒤쪽에 모자를 쓴 여인 카미유가 있다. 순백의 식탁보 위에 차려진 세련된 찻잔과 물병, 먹다 남은 빵 등의 흔적이 무척 평화롭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의 하얀 파라솔과 중앙 나뭇가지에 걸린 모자가 눈길을 끄는데, 이는 행복한 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명상이다.
안타깝게도 둘째 아이를 출산한 뒤 카미유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1883년 이후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해 두 번째 아내 알리스와 새 가정을 꾸리며 예술가로 크게 성공했지만, 카미유와 함께한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소중한 마음을 담아
사랑을 남기다

박수근
Park
Su
Keun
박수근 <아기 업은 소녀>, 1954, 개인 소장
가장 한국적인 화가, 박수근 화필 인생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초등학교 졸업 후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시작으로, 22~25세에 연달아 4차례 입선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26세에 동네에서 짝사랑하던 김복순과 결혼한다. 가장이 된 박수근은 평양도청 서기로 근무하며 주말에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가족을 모델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1940년 작 <맷돌질하는 여인>은 아내를 그린 것이며 이 작품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돌 질감 화풍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전형적인 화풍은 1950년 이후 완성된다. 그가 즐겨 다룬 소재는 주변에 쉽게보이는 소박한 일상이었다. 일제 강점기와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 이웃의 모습은 돌처럼 투박하고 다소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안에는 사랑과 희망이 있었다. 1950년대에 그린 <아이 업은 소녀>는 누나가 엄마를 대신하여 어린 동생을 업은 모습이다.이는 큰딸 박인숙을 그린 것이다. 검정 고무신과 단발머리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박수근은 1954년 작 <빨래터>를 통해 냇가에 옹기종기 모여 부지런히 빨래하는 여인들의 뒷모습을 담았는데, 그는 평범한 이웃들의 소박한 삶이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 생각했다. 특히 여인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며 연민을 느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이는 화강암의 질감을 그림에 도입하여 한국적 정서를 실었다. 오늘날박수근을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손꼽는 이유는 시대상이 반영된 소재와 화강암 질감에서 풍기는 향토색 때문이리라.

사랑은 돌처럼 영원하리라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온 박수근은 일자리를 찾던 중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려 주는 일을 겨우 얻게 되었다. 부지런히 초상화를 그린 덕분에 창신동에 집도 장만하고 방과 방 사이 쪽마루 아틀리에에서 작품에도 매진했다. 어느 날 박수근은 경주 남산의 <삼릉곡 선각여래입상> 등에서 오랜 세월을 견딘 마애석불(바위에 새긴 불상)을 보고 자신의 스승을 돌로 생각하게 된다. 돌은 세월이 지나도 영원한 시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박수근은 돌의 느낌을 내기 위해 나이프를 사용하여 물감층을 두껍게 쌓았으며, 곡선보다는 직선을 사용하였고 원근법을 무시해 어린아이와 같은 시선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국전 입선 작가에서 마침내 45세에 국전 추천 작가, 48세에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주한 미 공군 사령부 도서관에서 초대전도 가졌다. 그러나 과음과 스트레스로 왼쪽 시력을 잃은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여 1965년 51세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일 년 전 1964년 국전 추천 작가로 출품한 <할아버지와 손자>를 보자.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들, 쭈그리고 앉은 할머니, 구부정하지만 넓은 품을 가진 할아버지가 한 화면에 삼각 구도로 담겨 있다. 지극히 단순하고 근면하게 일생을 살았을 보통 사람들의 모습에서 진심과 감동이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품에 폭 들어간 손자는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할아버지의 보물이었을 것이다. 박수근은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사랑의 마음을 그림으로 영원히 남겼다.

박수근 <할아버지와 손자>, 1964,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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