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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생각

과거가 주는
미래의 지침서
해마의 장면 학습과 기억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 장면은 현재를 넘어 미래의 나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그렇다면 장면은
어떤 과정을 거쳐 기억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추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writing. 이인아(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교수)

우리 뇌가 감각 정보를기억의 형태로 저장하는 과정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가. 이 영화는 중년이 된 영화감독 주인공이 어린 시절 영화관에서 신부님의 검열 때문에 보지 못했던 키스신이 담긴 영화 속 장면들을 보며 감격에 겨워 눈물짓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오래된 흑백 필름 속의 키스신 장면들은 주인공에게 어린 시절 가난했던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고 누구보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겼던 알프레도와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장면들은 다시 오지 않을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갈 수 있는 통로와도 같은 구실을 한다. 비단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과거의 특정 경험이나 사건을 기억할 때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동창회를 가거나 옛날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를 만날 때, 특정 장면을 같이 떠올리면서 울고 웃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추억에 젖곤 한다.
우리 뇌는 현재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관련된 모든 감각 정보를 처리하며 이를 기억의 형태로 저장한다. 이를 뇌인지과학에서는 사건기억 혹은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이라고 부른다. 마치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듯 나의 두 눈이 보는 장면들 하나하나는 시간 순서에 따라 차례로 눈의 망막에 존재하는 세포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시상(thalamus)이라는 중간 정차역을 거쳐 우리 머리의 뒤통수 부근에 존재하는 뇌의 시각피질(visual cortex)로 전달된다. 시각피질을 포함한 시각 시스템에서 어떤 장면을 보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장면 구성은 이루어지지만, 시간적으로 장면을 연결시켜 하나의 사건(event) 혹은 스토리로 기억하는 역할은 뇌의 해마(hippocampus)가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해마는 특정 장면들의 시각적 정보뿐 아니라 그 장면들과 관련된 후각,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정보들을 통합하여 다중감각적(multimodal) 장면 기억을 형성한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자주 가는 카페 내부에 앉아 있는 장면을 떠올리면, 마치 그 장면과 결합된 커피 냄새와 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해마의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나의 뇌 속에 차곡차곡 쌓여
기억될 이 장면들은
훗날 어려운 시절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줄 수도 있고,
그릇된 선택을 막아 줄
지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마, 공간기억과 학습에 필수적인 뇌 영역

장면은 기본적으로 특정 공간과 연합되어 기억된다. 회사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떠올릴 때, 해당 장면은 당연히 특정 공간(예: 회의실)과 연합되어 떠오른다. 따라서, 해마가 공간기억(spatial memory)과 학습에 필수적인 뇌 영역이라는 것은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해마는 길을 학습하고 기억하는 데 필수적인 영역일 뿐만 아니라 길을 가는 동안 보았던 것들과 마주쳤던 일들을 기억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치매 등 뇌질환으로 인해 해마가 손상되면 새로운 길을 학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존에 잘 가던 길도 잊어버리는 인지장애를 겪게 된다. 이는 해마의 장소세포(place cell)라고 불리는 유형의 세포가 사멸하기 때문인데, 장소세포는 특정 공간상의 특정 지점(예: 회사 건물 내의 식당 앞)에서만 활동을 보이는 세포이다. 영국 UCL 대학의 존오키프 교수가 1971년에 쥐의 해마에서 장소세포를 처음 발견하였고, 이 공로로 2014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바 있다.
이처럼 우리 뇌의 해마는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 대한 지도를 형성하고, 이 인지적 지도(cognitive map) 안에서 나의 위치와 다른 사람들의 위치를 학습하고 기억한다. 그리고 특정 위치에서 경험한 장면들을 시간 순서에 맞게 학습하고, 훗날 이를 다시 시간 순서에 맞춰 인출할 수 있도록 한다. 이뿐만 아니라, 정서와 감정을 처리하는 편도체(amygdala) 등 뇌의 다른 영역들로부터 정보를 전달받아 특정 장면과 함께, 경험된 감정이 좋았던 것인지 슬펐던 것인지 등을 기억으로 저장한다고 알려져 있다. 어떻게 생물학적 세포들로 구성된 신경망(neuralnetwork)이 이처럼 복합적인 기능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뇌인지과학의 학문적 주제이며 많은 연구자들이 풀고자 하는 과학적 수수께끼이다.

일화기억과 장면기억에 관여하는 해마

해마가 공간을 바탕으로 한 일화기억과 장면기억에 특수하게 관여한다는 것은 H.M.이라는 영문 이니셜로 불리던 환자를 통해 1950년대 초반부터 연구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뇌인지과학의 큰 주제로 연구되고 있다. H.M.은 어렸을 때 사고로 머리를 다친 이후, 예전에 ‘간질’이라고 불리던 뇌전증(epilepsy)을 앓게 되었다. 1953년에 H.M.의 주치의는 그의 해마를 외과적 수술을 통해 적출하는 수술을 진행하였고 뇌전증은 호전되었다. 그러나 의사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학습과 기억에 장애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새로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즉, 새로운 일화기억을 형성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일화기억 능력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해 본 적이 없어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럴 때 추천할 만한 영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Memento)>가 있다. 혹 안 보신 분들이 있다면 한번 시간을 내서 꼭 보실 것을 추천하고 싶다.
영화 <메멘토> 속의 주인공처럼, 일화기억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은 현재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만 찰나적으로 인지할 뿐, 이를 기억의 형태로 나의 뇌 속에 영원히 부여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순간에 사는 삶이며 과거를 내 기억 속에서 소환할 수 없다. 과거의 특정 장면을 기억에서 꺼내서 생각하고 싶어도 인출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장면이 내가 과거에 본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마치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는 즉시 메모리 카드에서 삭제되는 것과 흡사하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동창회에 가서 남들이 하는 옛날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어서? 아니면 어린 시절 좋았던 추억을 다시 회상하고 특정 장면이 주는 아련함에 빠질 수 없어서? 물론 이런 것들도 불편하다면 불편할 수 있지만 생존과 직결된 문제는 아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과거의 기억

해마의 기능이 상실되면 과거에 벌어진 사건을 떠올릴 수 없고, 현재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과거 내 삶의 어떤 부분과 맞닿아 있는지 떠올릴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다음에 내가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흔히들 기억은 과거를 부여잡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뇌인지과학적으로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이유는 미래를 더 잘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혹독한 진화 과정 속에서 설치류와 영장류를 비롯한 모든 포유류 동물의 뇌가 해마와 같은 영역을 비슷하게 갖게 된 이유이다. 즉,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과거의 경험을 미래의 선택에 반영하는 것이므로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치 영화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 속 주인공 토토처럼, 길을 가다 어린 아이가 사탕을 먹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자신의 과거 특정 경험이 떠올라 회상에 잠기는 이런 경험은 이 시간 이후 자신이 무엇을 해 보고 싶다는 선택을 하게 할 수도 있다. 또, 업무상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 과거의 특정 장면을 떠올리며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과거와는 다른 방향의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과거의 장면들을 기억하고 그 장면들로부터 학습한 가치(value)를 떠올리는 것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가 더 잘 선택하고 행동하게 한다. 과거의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 이처럼 나의 미래에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내 앞에 벌어지는 장면 하나하나는 매우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나의 뇌 속에 차곡차곡 쌓여 기억될 이 장면들은 훗날 어려운 시절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 줄 수도 있고, 그릇된 선택을 막아 줄 지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를 담당하는 중추적 영역인 나의 해마가 건강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잘 지켜 주는 것 또한 잊지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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