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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정물 이야기

명화 속에 담긴 그 시절 정물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writing. 박혜성 (화가, 작가)

샤르댕 <부지런한 엄마>, 1740년, 루브르 박물관
그 시절 정물의 의미

해외 여행지에서 관광 명소 못지않게 끌리는 곳은 벼룩시장(Flea Market)이다. 벼룩이 들끓을 정도로 오래된 물건을 판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현지인은 물론 관광객들의 호기심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인기 있는 장소다. 가구, 그릇, 옷, 골동품, 그림, 책, 장식품 등이 거래되는데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혹자는 낡은 중고를 왜 돈 주고 사냐고 하지만 오랜 시간을 견딘 제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운이 좋으면 숨은 보석을 찾을 수도 있다.
1886년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한 화가는 흙먼지가 묻어 있는 가죽 구두 한 켤레를 헐값에 샀다. 그 구두는 왼 방향 두 개로 실제 신을 수는 없었지만 화가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낡은 구두에서 노동자의 땀을 보았으며 어쩌면 자신의 인생까지 투영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이다.
한편 최초의 정물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 Baptiste Siméon Chardin, 1699~1779)은 주부의 살림 용품을 그리며 일상의 소중함을 예찬했다. 남들이 화려한 꽃을 그릴 때 샤르댕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손때 묻은 소소한 물건을 주목하며 그 시절의 정서를 담았다. 일제 강점기에 그려진 한국 근대 화가 이인성(1912~1950)의 작품 <여름 실내에서> 역시 눈길을 끄는 색동 고무신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반 고흐, 샤르댕, 이인성의 작품을 통해 그 시절 정물 이야기를 해 보자.

Vincent
Van
Gogh

반 고흐 <구두 한 켤레>, 1886년, 반 고흐 미술관

반 고흐의 구두 한 켤레

어느 날 TV에 중국 화산의 짐꾼이 나왔다. 해발 2,160m에 달하는 화산은 산세가 험한 악산인데 짐꾼들은 그곳에서 50~60kg의 짐을 등에 지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의 남루한 신발이었다. 가족을 위해 피땀 흘리는 짐꾼의 낡은 신발은 가슴 아픈 훈장처럼 보였다.
반 고흐 역시 노동자의 신발을 신성한 훈장으로 본 것 같다. 반 고흐는 1886년 벨기에 안트베르펜을 떠나 동생 테오가 사는 파리로 건너왔다. 그는 동생과 몽마르트르에 거주하며 인상주의 화풍을 익히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화풍을 탐색했다.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가난한 농부와 노동자에게 관심이 많았던 그는 파리의 벼룩시장에서 노동자의 구두를 발견한다. 반 고흐가 구두를 정물의 소재로 선택한 것은 매우 창의적인 발상이었다. 알다시피 정물화는 꽃, 과일, 찻잔 등 주로 아름다운 소재를 선택하는데 반 고흐는 구두에서 외형이 아닌 내적 아름다움을 끄집어내고자 했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존경심과 노동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다.
반 고흐는 파리를 떠나 아를에 머물 동안에도 자신의 구두로 추측되는 구두를 몇 점 더 그렸다. 도시 빈민 혹은 노동자의 노고를 표현하기에 낡은 신발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반 고흐는 또 다른 신발 그림 <구두 세 켤레>에서 신발 한 짝을 살짝 뒤집어 놓으며 바닥이 닳도록 열심히 달린 사람들에게 조용한 찬사를 보냈다.

반 고흐 <고갱의 의자>, 1888년, 반 고흐 미술관

반 고흐와 고갱의 동상이몽

반 고흐의 파리 생활은 2년을 넘기지 않았다. 파리 화가들과의 교류도 원만치 않았고 대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1888년 아를로 이주한 반 고흐는 화가공동체를 구성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반 고흐는 동료 화가인 고갱을 아를로 불러들였는데, 고갱은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부탁으로 아를행을 결심한다. 파리 화상이었던 테오가 고갱의 작품 판매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동거는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깨진다. 같은 해 12월 작품에 대한 견해 차이로 크게 다투고 반 고흐는 귀를 자해했다. 이 일로 반 고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며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한 11월에 고갱의 빈 의자를 그렸다. 고갱을 보내기 싫었던 반 고흐는 그에 대한 애정을 담아 <고갱의 의자>를 완성했다. 화려한 카펫 위에 팔걸이의자가 보이며 두 권의 책과 촛불이 불타고 있다. 같은 시기에 그린 반 고흐의 의자는 차가운 타일 바닥에 파이프가 놓여 있는데 마치 각자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반 고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소재의 본질과 특성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그림에 담긴 그의 애잔한 감정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선택한 정물들, 즉 구두, 의자, 해바라기 등은 그의 고독한 삶이 반영되어 있어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Jean
Baptiste
Siméon
Chardin
샤르댕 <가오리>, 1728년, 루브르 박물관
남다른 길을 선택한 샤르댕

18세기 프랑스 미술계는 화려한 로코코 풍을 비롯해 고전주의 등 주제가 뚜렷하고 아름답거나 과장된 표현이 유행이었다. 그런데 소박하기 그지없는 부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이다.
샤르댕이 활동하던 시절 막강한 권위를 가진 프랑스 아카데미는 그림의 주제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 최고 등급은 역사화였으며, 다음으로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정물화가 이어졌다. 역사화는 실기 능력은 물론 역사, 종교사, 고전, 신화 등의 지식이 있어야 하기에 최상급 대우를 받았다. 아울러 역사 화가로 명성을 얻으면 그림도 비싸게 팔 수 있었다. 하지만 샤르댕은 주류 화풍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당시 유행했던 귀족 취향의 로코코 화풍과도 대조되는 아주 소박한 그림을 그렸다. 소위 팔릴 것 같지 않은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다. 가까이에 있는 소박한 정물에서 일상의 행복을 찾았으며 삶의 순간을 포착했다.
주류 화풍이 아닌 샤르댕의 그림들은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1728년 완성한 <가오리>가 주목받으며 그는 25세에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가오리>는 붉은색 가오리와 움직이는 고양이의 미묘한 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아카데미에서 원하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중산층 가정의 일상이 스며 있는 그림으로 평가받았다.

샤르댕 <물잔과 커피포트>, 1761년, 카네기 미술관
위대한 마법사 샤르댕

1761년에 그린 <물잔과 커피포트>를 보자. 검소한 부엌에 놓인 구리 커피포트와 물잔, 그 사이에 통마늘 세 개 그리고 시든 가지. 누가 봐도 하찮은 물건인데 그 안에 고요한 명상이 담겨 있는 듯한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담백한 구성과 부드러운 빛은 평범한 일상의 삶을 예찬하고 있다. 샤르댕의 정물화 소재는 물병, 냄비, 과일, 먹을거리 등 지극히 소박했다.
샤르댕은 정물화로 시작하여 점차 실내 풍경화로 확장해 나갔다. 그의 실내 풍경화 역시 평범한 일상사를 그렸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샤르댕은 루이 15세를 만나러 갔는데 그때 들고 간 그림이 <부지런한 엄마>였다. 루브르 박물관 소장품인 이 작품에는 물레를 돌리며 실을 짜는 엄마와 일손을 돕는 어린 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근면하고 부지런한 엄마는 가정의 근간이며 사회의 모범이다. <부지런한 엄마>는 왕의 마음에 들었으며 그 후 파리의 귀족은 물론 스웨덴,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 전역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의 작품을 구매했다. 심지어 샤르댕의 그림은 역사화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샤르댕은 독창적인 화풍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프랑스는 그의 교훈적인 그림을 지지했으며 그는 살롱과 아카데미에서 주요 인사가 되었다. 유행하는 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묵묵히 지킨 샤르댕. 그의 따뜻하고 정직한 그림은 ‘위대한 마법’이라는 평을 받는다.

Lee
In
Sung
이인성 <여름 실내에서>, 1934년, 수채화, 국립현대미술관
서양식 실내에 놓인 색동 고무신

붉은색과 초록색의 보색 대비를 이렇게 잘 살린 작품이 또 있을까? 실내와 실외를 대각선으로 나눈 구도는 과감하고 시원하다. 1934년 일제 강점기, 부르주아 집안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은 화려한 색감과 세련된 구도가 인상적이다. 레이스 테이블보가 드리워진 탁자, 쿠션과 의자, 중심을 차지한 식물 등은 서양식 실내 풍경이지만 좌측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색동 고무신은 한국적인 소재이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붉은색과 초록색을 고무신에 채색한 감각은 가히 놀랍다.
이인성은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작가다. 1912년 대구의 가난한 집안 둘째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그림을 그리던 중 정치가이자 화가였던 서동진 선생에게 수채화 지도를 받았다. 17세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입선을 시작으로 연이어 선전에서 수상하며 명성이 자자해졌다. 선전 및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 입상한 그림은 <그늘>, <카이유>, <가을 어느 날>, <여름 실내에서> 등이다. 정규교육에 아쉬움이 있었던 이인성은 대구 유지들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의 기회를 얻는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19세~23세) 도쿄에 머무르며 낮에는 크레용 회사에서 일하며 야간에는 도쿄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서 데생과 그림 수업을 받았다. 이인성은 12년 동안 선전에 출품하였고, 1935년에는 <경주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까지 받았다. 마침내 25살에는 선전 추천 작가가 되었다.

천재 화가의 황망한 죽음

이인성이 20세에 그린 <카이유>를 보자. 이 작품은 1932년 선전에서 특선한 수채화 작품이다. 이인성은 수채화와 유화에 능숙했고, 정물이나 풍경 혹은 인물 등 장르 구별 없이 모두 소화했다. 작품명 <카이유>는 일본말로 ‘쾌유를 빕니다’라는 뜻이다. 누군가의 병실에 놓였을 것 같은 화병에 꽂힌 카라 다섯 송이와 장미 두 송이가 무척 현대적이다. 배경의 속도감 넘치는 터치는 작품에 생동감을 준다.
그런데 순탄할 것만 같았던 이인성의 화업 인생에 불운이 닥친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인성은 24세에 결혼하여 삼 남매를 두었는데 어린 두 아이가 유명을 달리하고 31세에는 아내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1947년 세 번째 결혼으로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해 11월 취중에 경찰과 시비가 붙은 이인성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어처구니없이 세상을 떠났다. 39세 이인성 화백의 황망한 죽음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큰 손실이었다. 한국사 격동기에 불꽃처럼 타올랐던 이인성의 향토성 짙은 풍경화와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정물화는 우리나라 근대 회화에 주옥같은 작품으로 남았다. 명화 속 정물은 말이 없지만, 당시 화가의 열정과 온기는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인성 <카이유>, 1932년, 수채화,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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