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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은 기능인으로 취급받으며 낮은 계층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뛰어난 화가들에 의해 화가의 위상은 높아졌고 그들의 창작 활동은 위대한 능력임을 보여 주었다.

writing. 박혜성 (화가, 작가)

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1949년, 개인 소장

李 快 大

화가의 창작 행위는 위대한 능력

한국 근대 화가 이쾌대(1913~1965)의 자화상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한국 근대회화 자화상 중 가장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이쾌대는 월북한 작가이기에 그의 존재는 금기시되었지만 1988년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 이후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며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의 작품에는 자신이 처한 시대와 사회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보인다.
독일 르네상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자화상 역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뒤러는 미술 변방에 있었던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두 차례 유학을 한 후 자국의 미술을 발전시켰다. 뒤러가 미술사에 중요한 화가가 된 이유는 바로 자의식을 가지고 그린 자화상 덕분이다. 그는 화가의 창작 행위는 세상을 정화하는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Velázquez, 1599~1660)는 펠리페 4세 왕실 초상화 <시녀들>을 그리며 한쪽 귀퉁이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 왕실 초상화에 화가가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인데, 펠리페 4세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지위가 왕에게도 인정받는 자리임을 알린 것이다. 근대 이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은 기능인으로 취급받으며 낮은 계층으로 인식되었으나 뛰어난 화가들에 의해 화가의 위상을 높였을 뿐 아니라 화가의 창작 활동은 위대한 능력임을 보여 주었다.

이쾌대 <카드놀이 하는 부부>, 1930년, 개인 소장

도포자락 휘날리는 자화상

세로 72㎝, 가로 60㎝ 이쾌대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운 좋게 2015년 여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 작품을 직관하였다. 푸른 도포를 펄럭이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자화상은 눈이 시원해지는 청량한 그림이었다. 신기하게도 자화상의 정면 자세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이, 배경의 풍경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모나리자>가 연상되었다. 이러한 구도는작가의 서양미술에 대한 지식에 기반한 것으로 추측된다.
두루마기는 작가의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소재이다. 그가 쓴 중절모는 근대기에 도입된 서양의 복장이며 도시 남성들이 주로 쓴 것이다. 재밌는 것은 그의 왼손에 들린 팔레트는 서양화 팔레트인데, 오른손에는 동양화 붓을 들고 있는 점이다. 비록 서양화 기술을 터득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은 잊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보인다. 팔레트의 물감을 찍어 그림 그리는 자세를 취한 작가는 근대 조선인이면서 동시에 ‘나는 서양화가다’라고 외치는 듯하다.
이쾌대는 배경과 복장, 소품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화가는 당당한 자세와 굳게 다문 입술, 부릅뜬 눈으로 화가 자부심을 표현하였다. 이 그림에는 시대와 민족에 뿌리를 둔 서양화가로서, 현실을 직면하며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이쾌대 <군상1-해방고지>, 1948년, 개인 소장

비운의 월북 화가 이쾌대

이쾌대는 경북 칠곡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서양화가 장발(張勃, 1901~2001)을 담임으로 만나면서 그림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193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여 화단에 데뷔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유갑봉과 결혼식을 올렸고, 1934년 동경제국미술학교 입학 후 둘은 단란한 신혼생활을 보냈다. 인물화에 관심을 보였던 이쾌대는 당시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다. 아내는 그의 사랑스러운 뮤즈였다.
<카드놀이 하는 부부> 역시 아내가 부각되어 있다. 그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탐구하였고 이를 오마주하여 비슷한 구도로 이 작품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아내의 초상화에서 시작된 인물화는 차츰 조선의 여성상으로 변화하였다.
1938년 도쿄 니카텐(二科展)에 <운명>을 입선한 이후 3년 연속 입선한 그는 1941년 동경에서 이중섭 등과 같이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 서양화에 전통회화 기법과 색채를 도입한 한국적 서양화를 모색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이쾌대는 치마를 휘날리며 뛰쳐나오는 여성들, 절규하는 사람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 젖가슴에 매달리는 아이들 등을 역동적으로 그리며 일제 강점기에 억눌렸던 감정들이 폭발하는 장대한 역사화를 그렸다. 사망한 사람을 그린 것은 그들을 추모하는 마음이리라. 견고한 인물 표현, 박진감 넘치는 구성은 가히 압권이다. ‘해방을 알린다’는 뜻의 그의 작품 해방고지는 총 네 점이며 모두 2m가 넘는 대작이다.
이후 이쾌대는 1949년 36세의 나이로 제1회 국전에서 서양화부 추천작가로 참가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노모와 만삭인 아내 때문에 피난하지 못하고 북한군에 붙잡혀 스탈린,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부역을 하게 되었다. 서울은 탈환되고 이쾌대는 국군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감된 후 포로 교환 과정에서 북을 선택했다. 그는 초상화 부역과 친형의 월북으로 남한에서의 안전을 염려할수밖에 없었다. 남북이 갈라질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남에 남은 그의 가족은 이쾌대의 작품 60점을 잘 보존하여 근대 화가의족적을 남겼다. 그는 비록 월북 화가이지만그의 업적과 예술혼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Albrecht
Dürer
알브레히트 뒤러 <장갑을 낀 자화상>, 1498년, 프라도 미술관
귀족 자제로 변신한 화가

23세에 첫 베네치아 여행을 한 뒤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고향에서 본 화가들은 그저 수공업자로 낮은 계층일 뿐이었는데,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인문학자 혹은 귀족처럼 인정받고 있었다. 뒤러는 재빠르게 이탈리아 화풍을 익힌 후 예술가로서 자부심을 충전하고 독일로 귀국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화가는 여전히 수공업자일 뿐 변한 것은 없었다. 그 무렵 뒤러는 베네치아 귀족 의상을 입은 자화상 한 점을 그렸다. 머리에는 유행하는 줄무늬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 자제인 양 한껏 멋을 부린 모습이었다. <장갑을 낀 자화상>으로도 불리는 이 작품에는 이탈리아 화풍이 스며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알프스 풍경은 몇 년 전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본 기억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배경에 창을 그린 기법은 15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하여 유럽 각지에 유행한 화풍이며 밝은 색채와 온화한 분위기가 독일 화풍과는 차이가 있다.
뒤러는 우측 배경에 자신의 이름 첫 글자로 서명했는데 이는 과거 화가들은 하지 않았던 과감한 행동이었다. Albrecht의 A와 Dürer의 D를 가지고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서 서명하였다. 서명은 화가의 작품임을 보증해 주고 이름을 널리 알리는 일거양득의 역할을 한다.
27세에 그린 <장갑을 낀 자화상>에는 화가의 자부심은 물론 품격까지 깃들어 있다. 정교하게 그려진 머리카락과 수염, 흰 의상의 주름 등은 북유럽 르네상스를 대표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리스도를 닮은 화가의 초상화

1500년 그의 나이 29세에 그린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그의 자화상 중 가장 유명하며 동시에 서양회화에서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화려한 모피코트를 입은 화가는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데 얼핏 보면 그리스도처럼 보인다. 뒤러에게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빌려 화가의 위상을 올리려는 속내가 있었다. 전통 초상화는 측면이나 4분의 3면상으로 그려지며 정면상은 주로 성인이나 왕을 그릴 때 쓰는 구도인데, 뒤러는 파격적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정면으로 그렸다. 또한, 모피코트도 화가의 의상으로는 매우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뒤러는 자화상을 통해 ‘나는 위대한 화가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뒤러는 그림 배경에 “나,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9세의 나이에 불변의 색채로 나 자신을 이렇게 그렸다.”라고 썼으며 좌측 배경에는 자신이 만든 문양으로 선명하게 서명했다. 뒤러는 화가라는 직업에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고, 화가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도 특별히 공헌하였다. 뒤러는 독일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며 화가, 판화가, 조각가, 미술 이론가, 삽화가 등으로 활동했는데 그를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 자화상이다. 그는 화가의 창작 활동은 신의 능력과 비견될 정도의 위대한 일임을 알리고자 자화상을 의식적으로 과하게 그렸다.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년, 알테 피나코테크
Diego
Velázquez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년, 프라도 미술관
왕실 초상화에 왜 화가가 나와?

앞서 언급한 이쾌대, 뒤러와 같이 외향적인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릴 때 자신을 더 강렬하게 혹은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왕정 시대 궁정 화가들도 왕실 가족을 그릴 때 왕은 더 권위적이며 근엄하게 그리고 왕비나 공주는 실물보다 우아하고 사랑스럽게 그렸다.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을 보면 그런 특징이 잘 보인다. <시녀들>은 펠리페 4세 왕실 초상화로 중앙에 서 있는 꼬마는 공주는 마르가리타이다. 사실 합스부르크 혈통의 펠리페 4세는 유전병으로인한 주걱턱이 있었기에 공주의 실제 모습은턱이 돌출되어 있었다. 솜씨 좋은 벨라스케스는 공주를 최대한 미화시키며 왕과 왕비의 마음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녀들>은 일반적인 왕실 초상화하고는 거리가 있다.
우선 왕과 왕비를 거울 속에 가둔 점과 그림 속 인물들 다수가 관람자를 바라보며 특별히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은 <시녀들>을 신비하고 비밀스럽게 만들었다. 벨라스케스는 <시녀들>을 왜 이런 방식으로 그렸을까? 화가의 창조적 행위는 인문학자처럼 깊이 있는 정신 활동임을 왕에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왕실 가족화에 자신의 초상화를 자연스럽게 집어넣으며 화가의 존재감을 나타내고자 했다. 왕과 왕비를 캔버스에 담는 화가의 당당한 모습은 스스로 위상을 높이는 것이다.

산티아고 기사단이 된 벨라스케스

159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난 벨라스케스는 적잖은 재산을 가진 소귀족의 첫아이였다. 12살의 벨라스케스는 화가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제자로 들어가 5년 동안 도제 생활을 했다. 벨라스케스는 타고난 재능과 도제 수업 덕분에 20살에 소위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그리게 되었다. 나중에 그의 장인이 되는 스승 파체코는 벨라스케스에게 화법과 교양을 가르쳤는데 벨라스케스는 늘 앞서갔다.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풍과 자연주의적 경향을 수용했으며 가까이에 있는 서민을 모델로 그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618년 그린 그의 초기작 <계란을 부치는 노파>를 보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린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강렬한 그림이다. 뒷배경을 어둡게 처리하고 소년과 노파에게 빛을 부여함으로써 생생함이 한층 강화되었다. 그는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일상에서 소재를 구하였고 말년에 그려진 그의 대표작 <시녀들> 역시 왕실의 일상을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23년 펠리페 4세는 24세의 벨라스케스를 궁중 화가로 임명했다. 왕은 자신의 초상화는 오직 벨라스케스에게만 그리게 했고, 그가 소원한 이탈리아 체류도 허락했으며 말년에 산티아고 기사단 작위를 얻는 데도 막강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궁정 화가로서귀족이 되기를 열망했던 벨라스케스는 59세에 마침내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었다. 그 후벨라스케스는 <시녀들> 그림 속 자신의 의복 위에 산티아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를자랑스럽게 새겼다.

벨라스케스 <계란을 부치는 노파>, 1618년,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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