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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발견한
내일의 희망
HOPE

두 눈을 가린 여인이 한 줄 남은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그림을 보았는가. 절망적인 상황을 그린 이 그림의 작품명은 뜻밖에도 <희망>이다.
희망은 외부의 조건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writing. 박혜성 (화가, 작가)

와츠 <Augusta, Lady Castletown>, 1846년, ©Tate, CC-BY-NC-ND 3.0
희망을 주는 따뜻한 그림

우리나라 국보인 정선(1676~1759)의 <인왕제색도>와 영국 상징주의 화가 와츠(George Frederic Watts, 1817~1904)의 <희망>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일의 희망을 담은 것이다. 전자는 조선 시대 화가 정선이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친구의 병마 소식을 듣고 친구의 쾌유를 희망하며 그린 그림이고, 후자는 와츠가 의붓딸을 잃은 후 고통 속에서 다시 희망을 다잡는 그림이다. 와츠의 <희망>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04년 대통령 수락 연설 때 언급하면서 더 유명해진 그림이다. 또한 <인왕제색도>는 2021년 삼성가의 고(故)이건희 회장이 국가에 기증하며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사회 환원의 유지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 60점과 한국 근현대미술, 서양 근현대미술 작품 등 총 2만 3천여 점의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였는데, 예술품 기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를 제공한다. 한국 회화사에서 진경산수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인왕제색도>가 마침내 국가의 품으로 들어온 것이다.
동서양을 넘어 희망을 전하는 그림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긴 인생길에 크고 작은 시련이 닥치거나 깊은 절망감이 몰려올 때 우리는 희망이 더욱 간절해진다. 딸을 잃고 크게 상심한 와츠는 <희망>을 그리며 “단 하나의 코드라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했다. 사실 <희망>에 그려진 리라(Lyre, 기원전 발현악기로 하프의 원조 악기)에는 겨우 한 줄만 남아 있기에 연주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와츠가 이 작품에 희망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희망은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을 때 <희망>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어 보는 것은 어떨까?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국립중앙박물관(국보216호)

친구에게 보낸 진실된 마음 <인왕제색도>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는 음력 5월, 친구의 위중 소식을 들은 노화가는 친구를 위해 그림 한 점을 그렸다. 마음으로 “운무가 물러나는 인왕산처럼 훌훌 털고 일어나시게, 친구.”라고 되뇌며 손끝으로 대가의 노련함을 고스란히 담았다. 1751년 76세의 겸제(謙齋) 정선은 죽마고우였던 시조 시인 이병연(1671~1751)의 병문안을 나섰다. 정선의 품에는 병마에 고통받는 친구를 위로하는 그림 한 점이 들어 있었다. 그 그림은 오늘날 국보 216호로 지정된 <인왕제색도>이다. 봉우리는 검은색으로 힘차게, 운무는 맑고 부드럽게 그려 마치 비 갠 인왕산을 직접 보는 듯 생생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두 개의 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산은 아래에서 위로 본 시점이고 집은 위에서 아래로 본 시점인데 후자를 부감법이라 한다. 정선의 평생지기였던 이병연은 정선의 화필 인생에 큰 도움을 준 친구였다. 정선이 조선의 진경산수를 그릴 수 있게 물심양면 도왔으며 두 번의 금강산 유람도 이병연이 금강산 근처 김화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를 초대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이병연은 수입이 불안정한 정선을 관직에 추천하여 정선은 비록 낮은 직급이었지만 관직에도 오를 수 있었다. 오늘날 종로구 옥인동 수성 계곡에 가면 <인왕제색도>에 그려진 인왕산을 직접 볼 수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림과 실제 경치가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그림을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고 한다. 정선이 살았던 당시 화단은 중국풍의 관념적인 산수화를 답습하는 수준이었는데, 정선은 독창적 화풍인 진경산수화를 고안하였다. 이는 실제 경치를 바탕으로 과장과 왜곡, 생략을 적절히 사용하여 조선의 정취가 잘 드러난 그림을 말한다.

진경산수의 걸작 <정선필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와 더불어 정선의 또 다른 국보 <정선필 금강전도>는 삼성 미술관 리움의 대표 소장품이다. 영조 10년(1734년)에 그려진 <정선필 금강전도>는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 가운데 가장 큰 작품이며 진경산수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금강산 내금강의 실경을 수묵담채로 그렸는데 크기는 가로 94.5cm, 세로 130.8cm이다. 독특한 원형 구도로 윗부분에 비로봉이 서 있고, 중앙에는 만폭동 계곡이 수직으로 흐르며 맨 아래에는 장안사와 아치형의 비홍교가 있다. <정선필 금강전도> 역시 부감법으로 그렸다.
36세에 <신묘년풍악도첩> 속 금강산 그림에서 처음 진경산수 화법을 선보인 후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조선의 산수와 명승지를 직접 발로 다니며 수많은 진경산수화를 그린 정선. 특히 그가 말년에 그린 <인왕제색도>는 현재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기에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정선은 1759년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고 장수까지 했으니 더는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었다. 게다가 평생지기 이병연과의 우정은 그를 더 빛나게 해 주었다.

Jeong
Seon
정선 <정선필 금강전도>, 1734년, 삼성미술관 리움(국보 217호)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 <희망>

미국 최초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오바마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희망을 가져라, Take hope!”를 외치며 아주 독특한 그림 한 점을 소개하였다. 바로 와츠의 <희망>이었다.
<희망>은 흰 붕대로 두 눈을 가린 여인이 지구모형 위에서 한 줄의 리라를 켜고 있는 가련한 모습이다. 그녀는 리라에 온몸을 의지하며 손가락으로 줄을 매만지는데 자세히 보면 리라 줄이 단 하나만 간신히 붙어 있다. 7개 줄 중 6개가 끊기고 1줄만 남았으니 연주가 될 리는 없지만, 오바마는 이 그림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도 196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이 그림을 감옥에 걸어 두고 희망을 꿈꾸었다고 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현을 뜯으며 귀 기울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절망적인데 화가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와츠의 의붓딸이 세상을 떠나자 비통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와츠는 “단 하나의 코드라도 연주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다짐했다.

George
Frederic
Watts
와츠 <희망>, 1886년,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상징주의를 담은 그림 <선택>

와츠의 또 다른 그림 <선택>은 46세에 결혼한 와츠가 연극배우였던 16세의 어린 아내 엘런 테리를 그린 것이다. 여인은 화려한 동백꽃에 취해 향기를 맡고 있지만 사실 동백꽃은 향기가 없다. 상상으로 꽃향기에 취한 것이다. 두 사람은 일 년 후 파경을 맞는데 매혹적이지만 향기 없는 동백꽃, 근심 어린 표정 등은 부부의 결혼 생활을 암시한다. 와츠의 <희망>과 <선택> 같은 그림을 상징주의라고 한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성서, 신화 혹은 이국적이거나 신비한 분위기를 작품에 담았으며, 이는 화가의 내면에 있는 생각을 투영해서 그리는 화풍이다. 와츠는 “나는 사물이 아니라, 생각을 그린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상징주의를 잘 설명한다. 그림에 담긴 상징적 의미는 우리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선택>과 <희망> 속에 담긴 암시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지만, <희망>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그림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와츠 <엘런 테리(혹은 선택)> 1864년, 영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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