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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하루의 왕이시여,
    어떤 생일을 바라시나요?

    • 이명석(문화비평가)
  • 1년에 한 번, 나만의 날이 온다. 아침부터 사방에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오고, 근사한 생일상에 푸짐한 음식이 차려지고, 나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촛불을 끈다. ‘내가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구나’ 깨닫는 날.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세상이 바뀌며 생일을 바라보는 눈도 변화하고 있다.
생일상은 버라이어티 한 먹부림

고대 사회에서는 아무나 생일상을 받는 게 아니었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면 태어난 날을 기억 못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중요하게 챙기는 날들은 있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한 해가 되는 날은 ‘돌’이라고 축하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 1년 동안 살아남았으면 이젠 진짜 살겠구나 기뻐할 수 있었던 거다. 육순, 칠순 잔치는 장수를 기뻐하는 풍습으로, 거나한 상을 차려놓고 자식과 손주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러다 점차 개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누구나 매년 생일을 챙기게 되었다. 없는 살림에도 미역국과 쌀밥으로 생일상을 차리고, 형편이 나으면 주변에 생일떡이라도 돌리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는 생일에 장수를 상징하는 국수를 내놓는다. 호주에서는 색색의 달콤한 구슬을 넣은 페리 브레드를 먹는다. 프랑스에서는 크레페를 팬에 구워 생일자가 접시에 딱 맞게 올리면 행운을 얻는다고 한다. 각국의 음식 문화를 알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 생일상이다. 그렇지만 이제 어느 나라든 생일이라면 빠뜨리지 않는 음식이 있다. 큼직한 생일 케이크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그리드가 불우한 11살의 해리 포터를 찾아와 생일 케이크를 선물할 때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다. 지난 4월 육군 훈련생이 생일에 케이크 대신 천 원짜리 PX 빵으로 때우게 되었다며 인터넷에 올리자 큰 분노를 사기도 했다. 힘든 생활을 할수록 생일 날의 케이크는 달콤한 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케이크 위에 나이 수만큼 초를 꽂는 의식은 고대 그리스 또는 중세 독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기원이야 어떻든 간에, 우리는 촛불을 불어 끄며 다음 생일 때까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새로운 1년의 삶을 결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선물은 서프라이즈? 파티는 프라이빗?

가족, 친구들이 전하는 선물 상자를 풀며,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지 기대해보는 짜릿함이 없다면 생일이 아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은 말했다. “우리는 1년에 364일은 생일-아닌-날 선물을 받을 수 있어. 생일선물을 받는 날은 하루뿐이지.” 말장난이지만 어쩌면 미래의 세상을 예견한 듯도 하다. 이제 굳이 생일이 아니라도 케이크를 먹거나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생일에는 다른 의미를 가지거나, 좀 더 값진 선물을 받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몰래 준비한 서프라이즈냐, 아니면 갖고 싶은 걸 미리 물어보는 게 좋으냐? 요즘 유행하는 ‘밸런스 게임’과 같은 고민도 있다. 최근에는 아예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을 직접 사는 경우도 있다. 원더걸스 멤버였던 안소희는 유튜브에 ‘내 생일은 내가 챙긴다. 세상 진심 셀프 생파’라는 콘텐츠를 올렸다. 그러며 자기가 원하는 선물을 사서 직접 언박싱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팬들과 공유했다.
SNS와 스마트 기술 역시 우리의 생일을 변화시키고 있다. 예전에는 가족이나 절친이 아니면 서로 생일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엔 SNS가 자동으로 생일을 알려주기 때문에 얼굴 한번 못 본 사람들도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온다. 거기에 가볍게 톡으로 케이크나 음료 쿠폰을 선물할 수 있기에, 생일 챙기기는 더 쉬워졌다. 그런데 그런 만큼 생일 축하를 의례적 인사로 만들거나 그 의미를 가볍게 변화시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정말 가까운 사람들과의 특별한 생일 파티를 즐기기도 한다. 아이들은 키즈 카페, 어른들은 파티룸이나 호텔방을 빌려 소수의 친구들과 파티를 벌인다. 물론 자신의 집에서 소박하지만 정성 들인 파티를 즐길 수도 있다. 풍선, 가랜드, 전구 등을 모아둔 파티 장식물 세트가 잘 나와 있고, 어차피 1회용이기 때문에 중고시장 앱을 통한 거래도 많다. 그럼에도 파티 문화가 발달할수록, 여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 특히 아이들의 소외감이 커진다. 특히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은 아이가 친구들의 생일 파티에 끼지 못하거나 제대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할 때의 아픔이 있다.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는 이런 문제에 대한 특별한 해결책이 나온다. 호빗들에게도 생일은 아주 중요한 행사인데, 생일을 맞은 호빗의 친지들은 생일잔치 전날 선물을 비공개로 전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의 선물과 비교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생일은 나만이 아니라 모두의 잔치

미국 드라마 <빅뱅이론>의 주인공 레너드는 태어나서 한 번도 생일파티를 해본 적이 없다. 그의 부모가 ‘자신이 직접 성취한 것이 아닌 걸로 축하받아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식을 낳기 위해 고생한 어머니가 축하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괴팍한 생각이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일날 나를 낳아주고 돌봐준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호빗들은 생일날 직접 키운 과일, 꽃, 직접 만든 물건을 부모에게 전하는 게 중요한 행사다.
그렇게 모두를 초대해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인터넷 밈으로 많이 보이는 만화 <거인의 별>의 외로운 파티 장면을 보자. 주인공은 케이크에 음식을 차려놓고 고깔모자를 쓴 채 초대한 지인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도 파티에 나타나지 않자, 상을 엎어버리며 자기 인생이 실패했음을 깨닫는다. 영화 <더 게임>에서는 냉혈한 사업가로 성공 가도를 달려온 형의 생일에 동생이 선물이라며 게임을 시작한다. 마치 진짜처럼 형의 삶이 파괴되도록 연출하는데, 생일을 계기로 형의 지난날을 반성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요즘은 가수, 배우의 생일을 축하한다며, 팬들이 지하철, 버스 등에 광고판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자족적인 축하가 아니라 좀 더 의미 있는 생일을 만들 수는 없을까? 스타와 팬이 힘을 모아 기부, 모금, 봉사 등의 방법으로 생일을 축하하기도 한다. 가수 아이유는 자신의 마지막 20대 생일을 기념하여 팬클럽 ‘아이유애나’의 이름으로 희귀질환 아동 등의 지원을 위해 5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기업체들 중에도 창사 몇 주년을 기념하며 자선과 봉사에 나서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아이가 태어날 때 그의 미래는 알 수 없다.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을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 그렇지만 가족들은 소망한다. 이 아이가 1년에 한 번은 왕 못지않은 대접을 받기를. 생일은 바로 그런 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1년에 한번 왕이 된 마음으로, 세상의 어두운 곳을 챙겨볼 수 있지 않을까? 비틀즈는 세상은 커다란 생일 케이크라고 노래했다. 생일 케이크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어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