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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청기 감독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로보트 태권V’

    • 정임경
    • 사진 김범기
  •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는 히어로가 있을까.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만화영화 주제곡의 첫 소절만 들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며 딱 떠오르는 그 얼굴 ‘로보트 태권V’. 압도적인 크기와 힘, 환상적인 태권도 실력으로 악의 무리를 무찌른 히어로를 1970년대 아이들은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아이들의 꿈과 희망, 추억, 놀이로 끊임없이 회자되는 영웅 ‘로보트 태권V’를 만든 김청기 감독을 만났다.
金靑基
누구에게나 ‘로보트 태권V’에 관한 추억은 있다

1976년생, 키 54m, 몸무게 1,400톤의 거대 로봇, 태권V. 이름만 들어도 반갑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태권도 세계 챔피언 훈이 조종석에 앉으면 엄청난 힘을 내며 양발 돌려차기로, 밀어붙이기로 붉은 제국의 악의 무리를 처단한 영웅. 대한민국 최초의 토종 로봇 만화영화이자, 1호 로봇이었던 태권V는 1970년대, 80년대 아이들에게는 꿈이자 희망이요 또 놀이 대상이었다.
영에 참여하며 이력을 쌓았다. 화를 본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양팔을 곧게 뻗어 날아가듯 달려가 친구의 가슴팍을 찌르며 태권V 따라잡기를 즐겼다. 교실마다 태권V와 훈이, 영희가 생겨났다. 여자아이들은 서로 여주인공 영희 역할을 하겠다며 티격태격이었다. 공책 표지는 물론 책가방, 딱지 등에 등장하며 순식간에 아이들의 생활에 스며들었다.

볼거리, 즐길거리 없던 그 시절 ‘로보트 태권V’ 세대들에게는 그야말로 신드롬이었다. 현재 로봇 공학 박사 중에는 이 영화를 보며 꿈을 키운 이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로보트 태권V’의 광풍 뒤에는 태권V를 만든 아버지 김청기 감독이 있었고, 당시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토종 로봇 만화영화

어느덧 여든하나가 된 노 감독은 수십여 년의 전 ‘로보트 태권V’를 상영하던 날의 영화관 풍경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의 귓가에는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V.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두 팔을 높게 앞으로 뻗어 적진을 향해 하늘을 날으면 멋지다 신난다 태권V 만만세”라고 주제곡을 따라 부르던 아이들의 우렁찬 노랫소리가 들리노라고 했다.
“난리도 아니었어. 대한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온 아이들 줄이 극장은 물론 육교까지 쭉 이어졌지. 입장을 기다리면서도 아이들이 주제가를 다 따라 부르는 거야. 자리가 없어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은 버스를 동원해 세기극장으로도 보내기도 했어. 1970년대 당시 놀 것도 볼 것도 없는 아이들이 오직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만화영화를 보니 얼마나 좋았겠어. 반갑지(웃음).”
‘로보트 태권V’의 탄생을 아이들만큼이나 환호했던 이는 다름 아닌 김청기 감독 자신이었다. 당시 인기였던 일본 만화가 우리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며 언젠가 우리 만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가슴에 품고 다녔기 때문이다.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장군의 투구를 빌려와 태권V에 씌운 것도, 총이나 칼이 아니라 우리 태권도를 무기로 장착한 것 또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거대로봇 ‘로보트 태권V’는 그렇게 아이들 앞에 등장했다.

대한민국에 ‘김청기’라는 이름 세 글자를 알린 ‘로보트 태권V’는 만화가로, 애니메이터로의 활동한 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만든 집약체다.
어릴 적 만화를 그리며 놀던 한 꼬마가 어른이 되어 쏘아 올린 꿈은 다음 세대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자 추억, 그리고 놀이가 되었다.
만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던 놀이

만화를 그리는 일은 김청기 감독이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한 놀이였다. “놀 거리가 있어야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코믹 만화책을 보고 늘 따라 그렸어.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 만화를 그리곤 했는데 가장 재미있었지.”라며 웃어 보인다.
만화를 좋아하던 아이는 늘 엉뚱하고 재미있는 상상을 즐기며 전업 만화가로 자랐고, 펜싱을 주제로 한 만화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스토리에 음악까지 어우러진 디즈니 만화영화 ‘백설공주’를 보고 충격을 받은 김청기 감독은 만화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후 세기영화사에 들어가 ‘홍길동’, ‘황금철인’ 등의 만화영화 제작에 참여하며 이력을 쌓았다.
하지만 당시의 만화영화는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했고 거듭 흥행에 실패한 탓에 김청기 감독은 광고대행사로 자리를 옮겨 수많은 TV 광고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그 무렵 광고에 등장한 애니메이션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스토리텔링 및 영상, 편집 기술을 터득했고, 체득한 기술들은 훗날 역동적인 ‘로보트 태권V’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대한민국에 ‘김청기’라는 이름 세 글자를 알린 ‘로보트 태권V’는 만화가로, 애니메이터로의 활동한 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만든 집약체다. 어릴 적 만화를 그리며 놀던 한 꼬마가 어른이 되어 쏘아 올린 꿈은 다음 세대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자 추억, 그리고 놀이가 되었다. 그 이후로도 김청기 감독은 ‘똘이 장군’, ‘우뢰매’ 등 걸출한 작품을 탄생시키며 아이들의 사랑을 톡톡히 받았다.

여든하나의 청춘, 여전히 새로운 꿈을 꿔

새 소리, 물소리가 들리는 깊은 숲속에 터를 잡은 김청기 감독은 수년 전부터 즐겨온 엉뚱 산수화에 여전히 힘을 쏟고 있었다. 최근에는 부채에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부채를 펼쳐 보였다. 이 또한 자신의 놀이라며 그동안 그린 그림을 한 점, 두 점 꺼내 보였다. 산세가 푸르게 우거진 곳으로 놀러 나온 선비들을 뒤에서 지켜보는 태권V, 보부상의 행렬을 내려다보는 태권V, 조선시대 마을에 나타난 태권V 등 그 모습도 다양하고 재미있다.
“매일 아침 한 시간 정도 산책을 마치고 들어와 풍속화, 산수화를 그리고 색칠해. 재미있어. 이러한 보부상들 사이에 태권V가 나타났다고 생각해봐. 저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어!”라며 여전히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해가 지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완성한 작품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내 삶의 낙이야.”라는 김 감독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엷게 번졌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노력을 많이 하잖아. 그것이 무엇이든 즐겁고 재미있으면 좋겠어. 일이든, 놀이든 자신이 재미있는 것을 찾고, 그 즐거움을 조금씩 발달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 그 재미난 순간에 창조력도 나와. 공자가 그랬잖아.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그러니 신명 나게 즐겨봐!”
어린 시절부터 늘 재미있던 만화를 쫓아 온 김청기 감독은 여전히 새로운 만화영화 제작을 꿈꾸고 있다. 어느덧 여든한 살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꿈 많은 청춘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나라 고전인 심청전, 흥부와 놀부, 별주부전 등은 내가 꼭 만화영화로 만들고 싶어. 예전에는 판소리를 들을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달라졌잖아.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바꾸고 알라딘, 겨울왕국처럼 뮤지컬 만화영화를 만들고 싶어. 스토리도 다 생각해놨어. 빨리 이 코로나19 시국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고(웃음)!”
김청기 감독에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꿈꾸고 도전하는 마음’이다. 그 예전에도 아무도 상상해본 적 없었던 태권도 하는 거대 로봇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말이다. 여든이 넘은 노장의 눈빛이 이토록 반짝일 수 있는 까닭을 이제야 찾은 것 같다. 김청기 감독, 그의 놀이는 또 어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어떤 파장을 끌고 올지 벌써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