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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상의 쉼표 그 이상,
    어른의 취미

    • 이명석(문화비평가)
  • “노는 게 제일 좋아!” 뽀로로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노래한다.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고민한다. “노는 게 제일 어려워!” 주 5일제를 넘어 주 4일제를 말하는 시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에겐 여가를 알차게 보낼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재미와 보람과 배움이 어우러지는 어른의 놀이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
“취미가 뭐예요?”

20세기의 한국인들이 처음 만나면 던지던 질문이 있었다. “취미가 뭐예요?” 십중팔구 이런 대답이었다. “독서입니다.”, “영화 감상이지요.”, “등산이라고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아휴 ‘세상에 이런 일이’나 ‘기인 열전’에 나가 보세요.”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제 취미가 뭐냐고요? 일주일에 세 번 실내 클라이밍으로 땀을 빼죠.”, “저는 드라마 ‘퀸스 갬빗’ 마니아들과 어울려 체스를 둡니다.”, “한참 캠핑을 즐기다가 이제 지겨워져서 요트 자격증을 따고 있어요.” 취미 박람회라도 온 듯이 다채로운 취미를 자랑한다.
물론 이를 꼬집는 소리도 들린다. “피곤하지도 않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이나 자. 아니면 자격증 공부처럼 일에 보탬이 될 걸 해야지.” 하지만 막상 해보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 산악자전거를 탈 때는 근육통으로 월요일 출근이 고통스럽지만, 익숙해진 뒤에는 든든한 체력으로 일주일을 더 열정적으로 보내게 된다. 일이 힘들고 마음이 팍팍할 때에는 주말에 만날 ‘그 재미’를 생각하며 버틸 수 있다.
취미는 일상을 탈출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 전혀 다른 종류의 인생을 살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일요일 아침마다 수채화 한 장을 그리거나, 새로운 레시피를 구해 치즈 케이크를 구워내거나, 동호회 회원들과 합을 맞춰 댄스 공연을 할 때…. 우리는 일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몰입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감각은 실생활을 창조적으로 다루어가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기업체에서도 취미를 적극 권장하며 사내 동호회를 운영하고, 퇴근 후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유연근무제를 활용해 평일 낮에 여러 지점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취미를 즐기는 회사도 있다. 취미를 위해 지갑을 여는 일을 아까워하지 않는 하비 슈머(Hobby+Consumer)를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즐겁게 놀아봐야 한다.
취미 시장의 인기 테마도 트렌드에 따라 요동치고 있다. 과거의 취미가 앉아서 감상하는 위주였다면, 요즘은 바깥으로 나가거나 몸을 움직이는 ‘액티비티’의 경향이 강하다. 실내에서 의자에 붙어 있는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 몸을 움직이며 건강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인기가수 아이유가 등산화 광고에 나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등산, 러닝, 사이클 등도 젊은 세대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암벽을 타는 스포츠 클라이밍, 바다 깊이 들어가는 스킨스쿠버 등 좀 더 도전적인 분야에 나서기도 한다. 한동안 캠핑 열풍이 거셌는데, ‘요트 원정대’, ‘바닷길 선발대’ 등 TV 예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놀아라! 창조하라!”

“놀아라! 세상을 발명해라! 현실을 창조하라!” 세계적인 문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말했다. ‘메이커(Maker)’라고 하는 새로운 ‘만들기’ 취미도 어른의 놀이로 각광받고 있다. 과거에도 DIY가 취미의 주요 분야였지만, 최근에는 초소형 컴퓨터 장치, 센서, 컨트롤러 같은 공학 기술을 더해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3D 프린터를 활용해 시제품도 만들고, 로봇이나 드론을 만들어 대결하기도 한다. 만들기 취미를 통해 창업의 아이디어를 얻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른의 과학>이라는 잡지는 부록으로 1970년대 어린이 잡지처럼 조립장난감을 제공하는데, 그 수준이 놀랍다. 렌즈가 두 개 달린 이안 리플렉스 카메라, 천체를 투영해 감상하는 플라네타륨 등을 직접 조립하게 한다.취미를 매개로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한국 취미 문화의 독특한 성향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취미에 입문하는 연령이 상당히 늦다. 청소년, 대학생 때부터 꾸준히 즐기기보다는 어느 정도 직업적 안정을 얻은 30세 전후에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어떤 테마의 취미가 빠르게 유행을 타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성장 속도가 빠르다. 한국인들 특유의 노력하는 문화도 큰 원인이지만, 동호회가 활성화되어 취미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 ‘샐 위 댄스’에 나오듯이 춤을 학원에서 강사에게 배우는 것이 외국의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국내에서는 다양한 댄스 동호회에서 선배들을 통해 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문성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동호회 문화가 훨씬 저렴하고 편안하게 취미에 입문하도록 돕는 건 사실이다. 취미에 깊이 빠지면 직장 사람보다 동호회 사람들과 더 깊은 인간적 관계를 맺기도 한다.

“노는 데 한계는 없다!”

그런데 최근에는 정반대의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보드게임, 요리, 음악 감상 등의 취미를 위해 만나는데, 자신의 나이, 직업, 사는 곳 등의 사적인 정보를 일체 말하지 않는 블라인드 모임이 늘어나고 있다. 누구든 개인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면 상대를 그 틀에 맞춰 이해하려고 한다. “아기 엄마가 사교댄스를 배우러 왔어?”, “취업 준비생이 공부는 안 하고 보드게임을 해?” 그런 시선을 벗어나 단지 그 시간만 즐기고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취미와 놀이 자체가 목적인데 끈끈한 인간관계까지 맺어야 하는 걸 부담스럽게 느끼기도 한다.
한 가지 취미에 몰두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다양한 취미를 서핑하듯 즐기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베이커리, 가죽 공예, 수제 맥주, 생활자수 등을 원데이 클래스로 배우고, 그걸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SNS에 올리는 정도에 만족한다. 꾸준히 취미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여가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또한 ‘퀸스 갬빗’의 체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마작 등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특정한 취미를 짧게 경험해보고자 하는 경우도 많다.
코로나19 시대의 오랜 집콕 생활은 취미 문화에도 적지 않은 굴절을 만들어내고 있다. 반려식물 가꾸기, 퍼즐 맞추기 등 실내에서 혼자 할 수 있는 테마가 관심을 끌고 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취미 관련 강사들이 유튜브와 줌 강의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어떤 취미든지 지역과 시간의 경계를 넘어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꾸준히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하이퍼 로컬’이라고 해서 아주 가까운 지역에서 번개처럼 가볍게 모여서 취미를 즐기다 돌아가는 경우도 많아졌다. 여러 사이트와 앱들이 이러한 취미 생활의 변화를 선도하며, 새로운 놀이 문화의 플랫폼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