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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유혹들 가운데,
    지금은 공간이 가장 고프다

    • 이명석(문화비평가)
  • 사람은 집, 정원과 가게를 만들고, 그 공간은 다시 사람을 만든다. 창문 하나 없는 사무실, 싱그러운 나무들이 가득한 공원,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상점…. 우리는 다른 장소에 갈 때마다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곤 한다. 새로운 공간은 우리에게 새롭게 느끼고, 다른 생각을 하고, 뜻하지 않은 걸 사게 만든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떤 공간에 유혹 당하고 있을까? 오래된 공장을 개조한 카페, 거대한 실내폭포가 있는 백화점,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골목이 그 주인공들이다.
새로운 형태의 상업 공간 탄생

올해 초 현대백화점이 여의도에 ‘더현대 서울’의 개장을 알리자 반신반의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라는 역대급 위기와 온라인 쇼핑몰의 급속한 성장 속에 영업면적 8만 9,100㎡의 초대형 오프라인 매장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그러나 개장 직후부터 인근 직장인은 물론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삽시간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고객들을 첫눈에 사로잡은 것은 상품이 아니라 공간이었다. 전 층에 내려 비치는 자연채광, 세심하게 조경한 실내공원(사운즈 포레스트), 상쾌한 휴식을 제공하는 인공폭포(워터폴 가든)는 전시대의 백화점에서는 만날 수 없던 경험이었다. 쇼핑 이전에 휴식과 여가, 새로운 형태의 상업 공간이 우리 눈앞에 왔다.
백화점의 철저하게 의도된 공간 설계는 100년 이상 그 유효성을 증명해왔다. 재래시장과 상점가의 무질서와 자생성을 벗어난 고품격 상업 시설은 프랑스에서 출발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영화 <암살>을 보면 만주에서 온 전지현이 1930년 경성에 문을 연 미츠코시백화점의 화려한 모습에 넋을 잃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고급의 패션, 가구, 가전, 식품 등이 모여 있는 백화점은 부유함과 세련됨의 상징으로 명성을 이어왔다.
그 대칭점에 도시 상업 문화의 또 다른 중심인 스트리트가 있었다. 유행에 민감하지만 백화점의 진열대보다는 자신의 선택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명동의 다방 거리, 종로의 영화관 거리, 압구정 로데오의 패션 거리는 상업과 문화를 결합시키며 그 시대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가로수길은 카페, 레스토랑, 편집숍 등 세련된 상업 공간을 밀집시키며 전국에 유사한 복제 공간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미국 뉴욕 첼시마켓
  • 출처_일본 요코하마 뱅크아트 1929 홈페이지
기대 그 너머의 공간

21세기 들어 두 가지 주요한 키워드가 공간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첫 번째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주 5일제의 안착과 자가용의 보급으로 적극적으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이들은 교통 혼잡과 주차 문제 등으로 인해 한 장소에서 쇼핑, 문화, 식사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해결하기를 원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다양한 상점이 결합한 형태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코엑스 등 초대형 상업시설들도 각광을 받는다.
두 번째는 도시재생이다. 미국 뉴욕에서는 낡은 과자 공장을 개조한 첼시마켓, 일본에서는 은행 건물과 우편 연락선 창고를 바꾼 요코하마의 뱅크아트 1929, 파리에서는 장례식장을 예술가 레지던시와 전시 문화 공간으로 뒤바꾼 샹카트르 등이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면서 이와 유사한 프로젝트가 뒤를 잇는다. 국내에서는 구(舊)서울역사를 개조한 문화역서울 284, 고려제강 수영공장을 개조해 전시장과 상업시설을 둔 부산의 F1963, 20년 간 문을 닫았던 카세트 공장을 예술 중심의 복합 시설로 만든 전주의 팔복예술공장 등이 대표적이다.
소위 ‘뉴트로’ 트렌드가 결합하면서 스트리트 공간도 이런 특성을 띠게 된다. 성수동에는 폐공장을 개조한 카페, 갤러리, 스타트업 업체들이 새로운 트렌드 거리를 형성하고 있고, 전주에는 한옥 거리의 외관을 유지하면서 젊은 상업시설을 유치한 한옥마을이 만들어졌다. 부산, 군산, 인천의 구도심과 서울의 익선동 등 고풍스러운 분위기 속에 트렌디한 가게들이 자리 잡은 거리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왜 여가 시간에 새로운 공간을 찾아가려 하는가? 우리가 공간을 즐기는 방법의 원형을 돌아보자.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집안에 서재와 음악 감상실을 갖추고 자신의 취미 생활을 즐긴다. 여럿이 함께하고 싶을 때는 아름답게 가꾼 정원과 거실에 친구들을 초대해 멋진 요리를 대접한다. 좁은 집, 부족한 시간, 미숙한 경험, 이동의 어려움 등이 이러한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그 욕망을 대리 충족시킬 수 있는 공간이 카페다. 카페는 그 초창기부터 음료를 판다기보다는 이국적인 인테리어, 음악, 서비스를 결합한 총체적인 공간의 경험을 주는 데 집중해왔다. 그런 공간은 현대 한국인들에게 더욱 절실했고, 골목마다 들어선 카페들이 이런 기대를 채우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그 너머의 공간을 찾고 있다.

서울 삼성동 별마당 도서관
다양한 활동의 결합, 그리고 공간의 변화

신세계가 운영하는 ‘스타필드 코엑스몰’과 ‘별마당 도서관’, 현대카드가 북촌, 이태원, 청담동, 압구정동에 마련한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현대백화점이 만든 ‘더현대 서울’ 등 최근에는 대기업에서 만들어내는 공간들이 적극적으로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쇼핑과 문화를 결합시키는 단계는 이미 지나가고 있고, 누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를 통해 이미지를 판매하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큰 자본의 장점인 규모에 작은 자본의 장점인 스타일과 유연성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공간들은 규모 면에서 압도적인 스케일에 집중하는데, 이것 자체가 아주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좁은 집에 사는 도시 거주민의 갑갑함은 보통 야외 활동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최근 공원과 녹지를 늘리는 데 여러 지자체가 힘을 기울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혹한과 혹서를 거듭하는 기상 환경, 최악에 가까운 대기질, 가까운 교외도 오가기 어려운 교통 환경이 이러한 방법을 어렵게 만든다. 대신 자연 채광, 잘 가꾼 식물, 편안한 인테리어에 다양한 가게들이 결합된 초대형 공간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야외 공원 같은 실내, 길거리 상점가 같은 백화점, 가까운 위치이지만 이국을 여행하는 기분을 주는 분위기…. 물론 이런 공간이 큰 힘을 발휘하려면, 정적인 인테리어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문화 행위와 콘텐츠를 담아내야 한다. 단순한 식도락, 쇼핑만이 아니라 전시, 공연, 놀이 활동의 결합이 필요하다.
“달아나고 싶다. 다른 곳에 가고 싶다.” 그것은 자기만의 완벽한 공간을 갖출 수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욕망이고, 코로나19로 인해 집콕의 고통이 극대화된 이 시대에는 더욱 큰 바람이다. 너무나도 여행이 절실하지만 먼 여행은 불가능한 지금, 반나절 정도 여행의 느낌을 줄 수 있는 공간의 매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코로나19 이전부터 분명한 경향을 띠고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방역 상황이 개선되는 순간, 이러한 공간들을 향해 달려가는 발길은 아주 거세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