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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품 그 이상의 가치,
    라스트핏 이코노미

    • 김고금평 머니투데이 차장
  • 빠른 배송에 만족하는 시대는 지났다. 배달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제품 그 이상의 가치에 집중하는 라스트핏 이코노미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 소비자들이 상품을 받는 순간의 만족을 최적화하는 서비스로, 가성비보다는 ‘나’를 위한 서비스‘를 선호하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름이다. 이 시대의 진짜 delivery란 무엇일까.
지금 당장, 바로 여기

온라인으로 고기를 주문할 때 엄마와 딸의 기준은 다르다. 50대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고기는 역시 등급, 육질, 가격이지. 제대로 한 번 골라보자.” 20대 딸은 고개를 젓는다. “엄마 그건 전통 방식이라고. 이젠 그런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신선하고 정확하게 배달되느냐야.”
엄마는 딸의 이 같은 획기적 구매 방식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지만, 시대는 이런 방식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로 비대면 구매 방식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그간 중요하게 고려되던 전통적 구매 기준의 우선순위도 점점 밀려나고 있다.
상품을 바라보는 소비자의 감각이나 관점이 급격히 달라진 문화도 배제할 수 없다. 소비자는 이제 가격 중심의 효용이 아닌, 가치 중심의 효용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지금 당장, 바로 여기’에서 체감할 수 있는 가치가 충족된다면 언제든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얘기다.
소비자는 상품의 특성이나 브랜드가 주는 객관적 가치보다 상품과 자기 생활의 마지막 접점에서 즉각 느낄 수 있는 주관적 효용을 중심으로 구매 의사를 결정한다. ‘소비자와 직접,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지점’이 중요해진 소비 행태를 ‘라스트핏 이코노미’(Last Fit Economy)라고 부른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지난해 소비트렌드 10개 중 하나로 제시한 이 개념은 구매의 마지막 순간, 고객 만족을 즉각적으로 최적화하는 근거리 경제를 의미한다.
‘고객 만족’을 즉각적으로 최적화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가격이 조금이라도 더 싼 채널을 탐색하기 위해 투입하는 노력(정보 탐색→대안 평가→구매 실행→구매 후 평가 등 전통적인 소비 방식)보다 유료 멤버십에 가입한 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바로 다음날 새벽 대문 앞에 물건이 도착해 있는 편리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한다는 것이다.요약하면 마지막 순간에 최적화한 만족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아니라 ‘가심비’(가격 대비 마음)라는 얘기다.
‘라스트핏’은 ‘라스트 마일’에서 나왔다. 라스트 마일은 과거 사형수가 집행장까지 걸어가는 마지막 거리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현대에 들어 통신 업체가 네트워크 선을 각 가정에 연결하는 과정에서의 마지막 1마일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이 마지막 1마일이 서비스의 품질을 결정하고 소비자의 최종 만족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마지막 배송 접전’의 의미로 확산됐다.

배송의 라스트핏

라스트핏에서 배송은 일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3가지 정도로 의미를 확장해보면 △고객의 마지막 접점까지 편리한 배송으로 번거로움을 해소하는 ‘배송의 라스트핏’ △가고자 하는 목표까지 최대한 편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동의 라스트핏’ △구매나 경험의 모든 여정의 대미를 만족시켜주는 ‘구매 여정의 라스트핏’으로 요약된다.
‘배송의 라스트핏’의 가장 유명한 문구는 ‘새벽’이다. 새벽배송의 선두주자로 나선 ‘마켓컬리’를 시작으로 채식주의자를 위한 비건 전문 상품을 새벽에 배송하는 ‘헬로네이처’, 초신선 정육을 주문 1시간 내 배송하는 즉시배송 시스템을 갖춘 ‘정육각’ 등이 쇼핑의 최적화한 배송 시스템을 자랑한다.
이런 시스템은 유통업계뿐만 아니라 전 산업계에 걸쳐 구현된다. 가구업체 한샘은 최소 4일 걸리던 배송 및 설치 시간을 하루로 줄인 익일 배송 시스템을 현실화했고 빨래 대행업체 ‘세탁특공대’나 ‘런드리고’는 24시간 이내 세탁된 옷을 가져다 놓는다.
여기에 ‘정기구독’ 서비스는 지속적·주기적인 특징을 입혀 배송의 정점을 찍는다. 화장품, 기저귀, 비타민 등 필요한 상품들을 자유로운 배송일과 10% 할인이라는 혜택으로 마음껏 받아볼 수 있다.
누군가 ‘슬세권’을 얘기한다면 ‘이동의 라스트핏’이 실현 중이다. 과거 인기 입지 조건은 역세권, 학세권이었지만 최근엔 슬세권(슬리퍼 세권), 편세권(편의점 세권) 등 편리성이 제1의 조건이다. 멀리 나가지 않고 집 앞에서 모든 것을 경험하려는 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빠른 배송처럼 ‘지금 당장, 바로 여기’를 누릴 수 있다.
걸어서 10분 내 거리에서 쇼핑, 여가, 문화 활동 등 일상에 필요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는 마일인 ‘올인빌’(All-in-village)이 최근 새로운 주거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도 이 같은 흐름과 무관치 않다.

감각적·주관적 효용에 대한 가치

근거리 경제 트렌드에서 최근 주도적으로 활약하는 시장이 중고 거래 플랫폼인 ‘당근마켓’이다. 이전까지는 ‘중고나라’가 가장 큰 시장이었지만, 전국 단위보다 지역으로 쪼개진 근거리 문화를 선호한 추세를 반영해 역전됐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근거리 경제가 뜨는 것은 이동에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 경비를 최소화하고 더 많은 여유를 갖고자 하는 소비 트렌드가 반영된 결과.” 라며 “이는 마지막 접점에서 최적의 만족을 느끼는 ‘라스트핏 이코노미’의 핵심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구매 여정의 라스트핏’에는 박스를 개봉하는 순간의 경험을 반영한다. 기존의 언박싱과 다른 점은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다양한 제품을 구매한 뒤 박스 개봉 과정을 분석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과거 소비자들이 상품의 후기를 기능이나 효과에 집중했다면, 최근 고객들은 박스 사이즈, 박스 오픈 후 여백 공간의 차이, 포장 재질, 재활용 여부 등을 비교해서 분석한다.
SSG닷컴이 새벽배송 서비스에 반영구적 재사용이 가능한 보랭가방 ‘알비백’ 10만 개를 자체 제작해 선보이며 친환경 배송의 시작을 알린 것도 소비자가 최적화한 만족을 느끼는 과정의 일부로 삼기 때문이다.
라스트핏 이코노미의 등장은 가격과 기능을 앞세운 객관적 효용보다 감각적·주관적 효용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궤를 같이한다. 또 1, 2인 가구 증가도 한몫했다. 가구의 단위가 작아지다 보니, 소비의 단위도 점점 작아지고 편리성 중심의 사고로 이어지는 현상을 낳은 것이다. 1인 가구 구성원의 증가는 새벽배송이나 정기배송 서비스의 확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시공간 제약 없이 활동하는 모바일과 온라인에 익숙한 ‘포노 사피엔스’, 그리고 1인 가구 형태가 만드는 ‘마지막 접전’의 최적화는 아직 ‘현재진행형’ 이다.